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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Sep 07. 2024

#88. 몸을 달리고, 마음을 달래는

101번 글쓰기

몸으로 달리다 보니,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생각이 나서 쓰자면..


뜀박질

군대 시절이었다. 다른 중대 행정보급관 중 한 분은 시계가 17시를 가리키면 어김없이 “뜀박질 하고 온다~!” 외치며 위병소를 뛰쳐나가곤 했다. 민소매 런닝셔츠와 고무링을 두른 군복 하의, 두툼한 아웃솔의 군화를 신은 그 모습은 마치 전형적인 군인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강인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 나는 전역 후, 나도 그처럼 멋있게 뛰고 싶다는 생각에 자취방 근처 하천 둑방길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런닝이라는 것이 나에게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아웃솔에 쿠셔닝만 조금 있으면 신발에 상관없이 그냥 냅다 뛰었다.



잘 달린다는 것

학교를 졸업하고는 왕십리에서 자취를 했다. 근처에 청계천이 있어 도심 방향이든, 한강 방향이든 어디로든 달릴 수 있었다. 뛰면서 바라보는 풍경의 변화가 주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매일은 아니었지만, 틈틈이 청계천으로 나가 달렸다. 동대문까지, 시청까지, 때로는 한강까지.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코스를 정했다. 그 시점부터는 입사 후 장만한 첫 러닝화를 신고 달렸지만, 연애를 시작하고 회사 일이 바빠지면서 달리기는 점점 뒷전으로 밀렸다. ‘나이키 런’ 앱으로 기록을 하며 뛰었는데, 어느 순간 뛰는 횟수와 거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어떤 때는 3개월 내내 뛰지 않은 적도 있었다.


최근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육아휴직을 냈다. 처음에는 6개월을 계획했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니 1년을 꽉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매일 조금씩 자라났다. 어느 날은 분유량이 늘고, 또 어느 날은 목을 가누더니, 또 다른 날에는 내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이가 뒤집기를 하는 순간에는 휴직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적인 삶을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아빠가 되는 일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내게는 더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육아휴직 중 내 체중은 100kg에 육박했고,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이를 극복하고자 저녁마다 아이를 재우고 석촌호수로 나가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3km를 뛰었다. 체중 때문에 무릎이 너무 아팠다. 무엇보다도 3km조차도 한 번에 뛰지 못할 만큼 내 체력은 바닥이었다. 하지만 육아휴직 3개월 차에 접어든 요즘, 나는 8km를 거뜬히 뛰어낸다. 어제는 처음으로 1km당 5분대로 기록을 단축했고,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몸무게 앞자리가 8로 바뀌었다. 매일 뛰며 느끼는 몸의 변화는 꾸준함이 가진 힘을 몸소 체감하게 해주었다.


잘 달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기록을 남기는 것일까, 오래 달리는 것일까, 아니면 멀리 달리는 것일까? 빠르게 달리는 것이 잘 달리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잘 달린다’는 것을 상대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했다. 하지만 상대적인 기준으로는, 프로 선수가 아닌 이상 ‘잘 달린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그렇다면 ‘잘 달린다’는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일까? 어쩌면 멈추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잘 달리는 것’이 아닐까.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된 무리함이나 포기가 아니라, 그저 계속해서 달리는 것. 결국, ‘잘 달린다’는 전제는 ‘내가 달린다’는 것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이키가 “몸과 정신으로 도전하는 모든 사람을 운동선수로 정의한다”는 그 말처럼, 달리기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잘 달리고 있는 셈이니까.



체력보다 집중력

잘 달린다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라면, 체력보다는 집중력이 더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배우 황정민이 출연한 유튜브 콘텐츠를 보았다. 그는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순간이 온다고 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에 이르는 그 경지에서 체력의 부족함은 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황정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체와 하체가 따로 노는” 그 순간,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된다. 몸의 각 부분을 세밀하게 읽어내는 그 집중의 순간에는, 발바닥의 통증조차도 뛰는 걸 멈추게 하지 못한다. 대신,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석촌호수를 달리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제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뒤처지기도 한다. 각자 자기만의 페이스로 달리고 있으니 누가 나보다 빠른지, 누가 느린지 분간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나를 제쳐 달려가다 어느 순간 걷고 있을 때도 있고, 내가 앞서갔던 누군가가 어느새 나를 앞지르기도 한다. 모두가 자기만의 마라톤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달리기의 매력은 나만의 페이스를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 남들과의 비교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남들이 나를 앞서가건, 내가 뒤처지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비단 달리기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때,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나 자신만의 결핍을 채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나만의 페이스로, 나만의 길을 달려갈 수 있다.


자존감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달리기를 통해 자존감을 쌓아가는 방법을 익혀두는 것은 큰 자산이 될 것이다. 남들과 비교하는 것이 일상인 이 시대에, ‘나’에게 집중하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의 기준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경험을 한다면 우리의 삶은 한층 더 건강해질 것이다.



육아휴직 동안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물론, 달리기를 통해 나는 직업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나를 위한, 나만의 작은 행복을 찾는 방법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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