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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Jun 25. 2021

#47. 참전용사

101번 글쓰기

1952년 6.25 참전중 전상

우리 외할아버지는 1932년 이북 황해도에서 태어나셔서 19살이 되던 해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 일제 치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셨고, 중학교에 올라가시던 해에 해방이 되셨다. 그렇게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나눠 통치하던 시기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셨고, 대학을 꿈꾸던 시기에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본인의 발로 참전하셨다. 외할아버지의 말씀으로는 공산당 치하에서 살기 싫으셨기 때문에 국군에 자원입대 하셨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38선에서 잦은 전투가 일어났었기 때문에 곧 끝나리라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형제자매 어머니와 이별하고 국군으로 활동하시다가 '52년에 부상을 입고 부산으로 이송되어 전역하셨다고 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압록강까지 괘속북진했을 때, 고향에 들러 어머니(나에게는 고조할머님)께 안부인사를 드리고 부대를 따라 북상하다가 중공군 반격에 후퇴하다가 서헤 백령도로 고무보트에 숨어 겨우 남쪽에 내려오셨다고 한다. 이 때가 외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시간이었다고 했다. '53년 휴전 이후에는 북에 있는 가족들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시고 사셨다고 했다. 덤덤하게 말씀하셨지만, 좋아하시던 예전 가요가 있으셨는데 그 노래를 부르실 때 마다 눈물을 보이셨다. 어릴 때는 어떤 감정일 지 몰랐는데, 나도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어떤 감정일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2020년 1월 30일


외할아버지가 병상에 누워계신지 3년째 되던 해,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여느 날과 다름없었다. 광고회사를 다니던 나는 항상 일에 치였고, 그 날도 야근과 주말출근이 예정되어 있던 날이 었다. 금요일의 저녁이 유독 컴컴하다고 느껴졌는데, 퇴근 시간 즈음 엄마가 울며서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돌아 가셨다고.



어릴 적 기억도 없을 때,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뵌적은 있으나 기억이 없으니 친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없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명절 때마다 찾아 뵙기는 했으나 할머니와의 추억이 없어 그 때도 별 감정은 없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마음이 너무 착잡했다. 흙탕물에 젖은 솜 같이 무거웠다. 그렇게 외할아버지 사진만 쳐다 보면서 '돌아가셨구나' 했는데, 염을 할 때 마지막으로 외할아머지의 차갑고 물렁한 손을 만지니 감정이 북받쳤다. 오른손 중지의 반이 없었던 외할아버지의 손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 없었다.


돌아가실 때까지 외할아버지는 부모가 없는 고아였고, 병상에 누워계실 때도 고아셨다. 홀로 남한에 살아남아 가족을 꾸리셨지만, 결국 외할아버지는 혼자셨을 것 같다. 그렇게 지금도 대전 현충원에 홀로 누워계신다.


1950-1952년 참전


외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참전했던 전선은 1사단이 있었도 곳이라고 하셨다. 한 번은 30명 중대가 야간기습을 갔다가 네다섯명만 살아 돌아온 적이 있다고 하셨다. 거기서 전투를 하다가 전라도에서 공비토벌대 활동을 하셨다고 했다. 한 번은 공비에게 포섭된 주민이 있어서 깊은 산골짜기에서 급습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고 하셨다. 한 번은 포탄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오른손 중지와 복숭아뼈를 잃고 부산으로 이송되어 전역하셨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전역을 하셨다.


1953-1965년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외할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와 상이군인촌(지금의 혜화동)에 방을 구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셨다. 다행히 고향 선후배들과 연락이 닿아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한양대 전기과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셨다. 이 때 사귀셨던 친구분들이 나중에 성공한 사업가, 고위관료가 되어 외할아버지 사시는 데 큰 도움들을 주셨다고 했다. 이 기간 중에 박정희 대통령과 조우하기도 했다고 하셨다. 그게 그 시대 분들에게는 큰 자랑거리라고 하셨다. 이후 1962년에 외할머니를 만나 결혼하셔서, 의정부에 터를 잡으셨고 우리 엄마를 첫째로, 이모와 외삼촌을 낳으시고 의정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외할아버지는 국가유공자 자격을 늦은 나이에 받으셨다고 하셨다. 본인은 먹고 살만 하니 국가로부터 도움 받는게 꺼림칙 했다는게 이유셨다. 나 같으면 바로 신청해서 혜택을 봤을 텐데, 외할아버지는 본인보다 어려운 사람이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자식들 교육 다 시키고, 출가까지 시킨 다음에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셨다. 빠르게 자격을 득하셨다면 엄마나 이모, 삼촌이 학교 다닐 때 진학이나 장학금 받기도 훨씬 쉬웠을 텐데, 그게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6.25는 나에게는 항상 지나칠 수 없는 날이었다. 외할아버지가 항상 계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계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6.25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특히나 6월만 되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진 1월 30일 만큼이나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도 하다. 외할아버지와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조금 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짙고 풍부했을텐데, 아쉽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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