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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무표정_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by 정유철

"지금 기차가 탈선해서 사고가 났어요. 교통 통제 중입니다. 근방은 전부 다 그래요. 앞 차들 따라서 차 돌려주세요."

정하는 순경의 말을 듣고 마음이 철렁했다.


순경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주현과 정하의 눈이 마주쳤는데, 두 사람은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서로 눈치챘다.


정하는 타이핑을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믿게 됐다. 이모가 탄 기차가 사고 난 건 아니겠지 생각하는 순간, 속마음을 엿들은 듯 주현이 똑같은 말을 했다.

"언니, 우리 엄마가 탄 기차는 아니겠지?"


정하는 어느 것도 장담할 수 없기에 뜸을 들이다 말을 꺼냈다.

"아니지 당연히! 엄마 잘 오셔서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 기차에 배터리가 다 돼서 전화 못 받으시나?"

평소같이 않게 말이 긴 정하는 불안한 속마음이 들킬까 봐 주현 쪽을 보지도 않고 앞만 봤다.


사실 정하는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주현의 꿈이 떠올랐다.

움직이는 컨테이너에서 앉아있는 이모를 상상해 보니, 꼭 기차 속에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다. 도대체 주현이는 왜 이런 꿈을 꾼 걸까. 개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꿈은 단순한 수면 속 상상의 세계가 아닌 걸 알고 있다.


주현은 계속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듯했다.

"주현아, 부재중 찍힌 거 보면 연락하시겠지. 불안해하지 말고 좀만 기다려보자."

정하는 우선 차를 돌린 후 어딘가에, 아니 아무 대라도 차를 세워두고 역까지 가야겠다 계획을 세웠다.

정하는 손톱을 물어뜯으려는 주현의 손을 잡아줬다. 또 다른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주차할 곳을 겨우 찾았다. 앞쪽 차들은 죄다 유턴 신호를 기다리느라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하는 도로가 잠깐 느슨해진 틈을 타 어느 골목길로 차를 넣었다. 막다른 곳이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차가 지나다닐 일은 없으니 말이다.


"주현아, 손톱을 왜 자꾸 물어. 여기다 일단 주차하고 역으로 같이 가보자. 걱정 마."

다짜고짜 골목길에 차를 넣고 시동을 끄니 주현이 놀란 얼굴로 정하를 봤다.

"여기다가 세워도 돼?"

정하는 괜찮다며 벨트를 풀고 서두르라며 주현을 재촉했다. 골목길 안쪽 초록색 철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한 아저씨가 두 사람 쪽을 계속 쳐다봤다. 아마 다짜고짜 차를 세운게 주차한 건 아니겠지 하며 생각한 동네 주민이리라. 정하는 되려 차 빼라는 말을 들을까 봐 주현의 손을 잡아당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려동주민센터를 지나 좁은 길을 나오니 저 멀리로 여수역이 보였다. 미처 아직 돌리지 못한 차 몇 대가 보일뿐 아까보다는 도로상황이 괜찮았다. 그리고 구급차와 소방차가 도로 위를 거의 꽉 채웠다. 도로 위 모든 차들 위로 번쩍이는 경광등 때문에 눈이 부셨다.

사이렌 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현이 정하의 팔을 잡아당겼을 때, 그제야 무언가를 소리치고 있는 걸 알았다. 사이렌 소리를 뚫기 위해 주현이 정하의 귀에 대고 큰 소리를 쳤다.


"여기 오지 말고 돌아가라고 뒤에서 경찰이 소리 질러. 어떡해 언니."

뒤를 돌아보니 그제야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자신들을 부르는 순경이 보였다.

그 순간 정하는 생각 했다.

‘기차를 탄 가족이 전화를 안 받아서 역까지 가보겠다고 하면 순순히 그러라고 할까?’


마음을 정한 정하는 주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더 꽉 잡은 손이 신호인 양 두 사람은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주현도 정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두 사람은 잡고 있던 손 마저 놓고 있는 힘껏 내달렸다. 도로가 길게 뻗어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꽤 달렸는데도 역까지는 거리가 남은 게 보였다.

정하는 숨이 차서 달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몇 초에 한번, 주현이 같이 달리고 있는지만 고개를 겨우 돌려 확인했다. 정하는 주현의 목소리가 멀어진 곳에서 들려 뒤를 돌아봤다. 힘이 다 빠졌는지 뒤쳐진 주현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언니! 같이 가! 언니! 나 두고 가지 마!"

사이렌 소리를 뚫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주현을 보니, 정하는 울컥 숨이 꽉 막혔다. 재윤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형님을 애타게 부르던 재윤할아버지의 어릴 적 모습은 어땠을까.



겨우겨우 달려오는 주현을 기다렸다가 손을 잡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주현의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정하는 손을 더 세게 앞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좀만 더! 좀만 더 가면 돼. 엄마, 기다리고 있을 거야. 좀만 더!"


여수역 앞 광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구조대원들과 역에서 나오는 승객들이 뒤섞여 한 치 앞만 겨우 보였다. 도무지 누구를 찾고 분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하와 주현은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을 꼭 잡고, 까치발을 들어 사방팔방 시선을 뿌렸다.

관광안내소 옆쪽 천막에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고 정하가 발견했다.

"주현아, 저쪽으로 가보자."

울어서 눈이 충혈된 주현은 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파를 헤집고 들어간 천막 안에 이모가 앉아있었다. 정하는 이모를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주현은 정하의 손을 놓고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얘들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게? "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하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정하는 말한마디 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숨이 찬 정하는 말하기가 힘들었지만, 쥐어짜 낸 몇 마디로 설명했다.

"기차가 사고 났다길래, 혹시나 이모 일까 봐, 걱정이 돼서, 그랬나 봐요."

주현을 안아주던 이모는 한쪽 팔을 들고 정하도 오라며 잡아당겼다. 이모의 품에 들어간 정하는 숨을 다 고르고 나니 다리가 계속 풀려 말썽이었다.


애틋한 표정의 이모는 글썽한 눈으로 정하에게 말했다.

"그래서 정하 너도 걱정이 돼서 그렇게 울었어?"


놀란 정하는 자신의 얼굴을 소매로 닦았다. 땀인지 눈물인지도 모를 만큼 정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세 사람은 바로 옆 벤치에 한참을 앉아서 쉬어야 했다.


세 사람이 벤치에 앉아 있는 동안 눈이 내렸다. 두꺼운 눈송이가 땅에 떨어지더니 곧 하늘이 새하얗게 뒤덮였다.


눈이 나리는 걸 보며 정하는 재윤할아버지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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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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