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 취소로 받은 선물

책으로 도피하고, 책 밖으로 나가다

by 우지


교환학생 비자 발급을 받은 시점, 전염병이 발병했다. 한 지역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시를 두른 흉악한 병원체는 외출을 제한했고 교환학생을 취소시켰다. 한국에 있어야 했기에 급하게 다음 학기 시간표를 짰다. 벗어나고 싶었던 전공을 다시 마주했다.


나의 일상은 무너졌다. 해가 뜨면 잠을 자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일어났다. 하루 종일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했다. 온라인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고 마감일이 다 되어서야 겨우 과제를 끝냈다.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마주한 새벽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간이었다.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낸 거지?
외국어 공부에 투자했던 돈과 시간은 뭐지?
생활비를 모으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던
고생은 뭐가 된 거지?
내 인생은 왜 이런 거지?

매일 새벽, 의미 없는 하루를 보냈다는 자괴감과 결론이 없는 자책의 시간을 가졌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머리를 짓누르는 무력감으로 방 안에 한없이 찌그러져 있었다. 전염병의 끝이, 내 무기력의 끝이 언제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침대에 누워있다 책장 속 책이 눈에 띄었다. 책 읽은 지 얼마나 되었더라.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기는 중학교 1~2학년이었다. 그땐 학교 도서관에 있던 모든 추리·스릴러 소설을 탐독했다. 이 시기가 지나고 읽었던 책이라곤 권장 도서와 필요로 읽은 책뿐이었다. 그런 내가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책 한 권을 꺼냈다. 심심한데 책이나 읽어볼까.


지루한 일상 속 추리소설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분명 읽었던 소설인데도 처음 읽는 느낌이 들었다. 한 권을 읽고 책장 속 다른 책을 꺼냈다. 이번엔 자기 계발 서적이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마치 저자처럼 열심히 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현실의 나는 그대로인데 말이다. 자기 계발 서적에선 책을 읽는 건 좋지만,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당시 읽었던 책은 다독(多讀)을 강조했기에 ‘책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있던 책을 전부 읽었다. 더 많은 책을 읽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도서관에 가자.


도서관의 방역 시간이 정해져 있어 버스를 잘못 놓치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굳이 가야 했다. 침대에만 누워있던 내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이 책이었으니까. 그 안에서 나는 소설의 주인공, 에세이의 저자, 자기 계발 서적의 저자가 될 수 있었다. 어느새 게임 중독 대신 활자에 중독되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고 읽은 지 시간으로 일 년, 책은 약 300권이 넘어갈 때였다. 평소처럼 도서관으로 향했는데, 엊그제까지 보이지 않던 홍보물이 열람실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문화 교실 프로그램 홍보물이었다. 수많은 프로그램 중 눈에 들어온 건 ‘서평 쓰기’ 수업이었다. 많은 책을 읽지만, 기록이 어려웠던 나를 위한 수업 같았다. 어색해진 오프라인 수업을 고민하다 점점 줄어드는 자리에 급히 신청했다.


수업 날짜가 되어 도서관 강의실로 가니 다양한 나이대의 수강생이 있었다. 강사는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간단한 서평이나 한 페이지 분량의 서평을 작성하여 발표하는 수업이라고 소개했다. 첫 시간이니 간단한 자기소개와 최근에 읽은 책, 앞으로 읽을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는 한국 소설을 좋아했고 누군가는 에세이를, 고전소설을, 미술 서적을 좋아했다. 독서 취향이 모두 달랐기에 한 책을 같이 읽으면 어떤 서평이 모일지 궁금했다.


일주일 후, 각자의 서평을 발표했다. 모든 수강생은 같은 책을 같은 시간 동안 읽었지만, 서평이라는 결과물은 달랐다. 글에는 각자가 살아온 인생이 보였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봉사하는 수강생,

돌아가신 아버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수강생,

자신의 커리어를 잠시 놓고 전업주부가 되어 새로운 삶에 뛰어든 수강생,

일상과 고통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수강생,

가족의 아픔을 딛고 살아가는 수강생,

자기 삶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피아노를 말하는 수강생 등.


책과 글을 건너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볼 수 있었다. 글은 인생을 가치 있고 깊이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잠깐 책을 읽으며 한 뼘 자란 정신세계에 자만했지만, 진짜 어른들을 보고 나니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넓혀준 사람만큼은 잊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알지 못한 세상을, 생각의 폭을 넓혀 준 강사와 수강생만큼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서평 쓰기 수업에서 이어진 인연은 여전히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고 나눈다.




일주일에 한 번 밖으로 나가던 내가 일주일 내내 햇빛을 봤다. 사람을 만나 함께 책을 읽고, 공모전에 도전했다. 함께 책을 읽던 분이 축제 시민참여 행사를 추천했다. 서류와 면접도 보고 프로젝트를 내 손으로 키워갔다. 글쓰기 실력을 늘리고 싶어 시작한 시민기자 활동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했다.


그늘 안에만 있던 나를 책은 바깥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여전히 책은 나와 세상의 연결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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