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덜너덜한 노트

에필로그

by 우지

친구 H는 꾸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학교 안에서 꾸밈이 가능한 것은 노트였고, 그 친구는 반에서 노트 필기를 가장 잘했습니다. 비싸고 화려한 노트, 색색깔의 형광펜, 예쁘게 정돈된 글씨체로 작성한 노트는 한눈에 보기에도 완벽했습니다.


그에 비해 화이트로 잔뜩 칠해진 제 공책은 예쁘지 않았습니다. 가장자리에는 선생님이 추가로 알려주신 부분이나 교과서에 중요한 부분을 옮기고 나면 모든 종이 면이 빽빽하게 채워졌습니다. ‘나는 왜 H처럼 예쁘게 필기하지 못할까’ 생각했지만 차마 따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H가 노트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역시나 정갈하고 아기자기한 글씨를 쓰고 있었습니다. 글씨를 보던 중 펜이 멈추었습니다. 친구는 인상을 찌푸린 채 노트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씨 틀렸어. 이럴 때마다 짜증 나.


H는 그 종이를 찢어버리고 다음 장에 새로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화이트로 지우면 되지 않냐고 물으니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단 하나의 흠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노트는 특징이 하나 있었습니다. 언제나 화려하고, 예쁘고, 시간이 지날수록 얇아졌습니다.




12월이 되자 학교에 교과서를 버릴 수 있는 트럭이 운동장으로 들어왔습니다. 1년간 공부했던 교과서와 공책은 대형트럭 위로 던졌습니다. H 역시 트럭 위로 교과서와 공책을 던졌습니다. 정성스럽게 관리했던 노트를 과감하게 버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끼던 노트를 왜 버리는지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공책 3-5장만 쓰고
나머지는 빈종이야.


화려하고 예뻤던 H의 노트는 어느새 다른 학생이 던진 교과서에 가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점차 가려지던 노트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화려하고 아름답게 살아갔던 한 노트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완벽을 추구하며 아름답던(美) 노트는 채워지지 않은 채 버려졌습니다. 그에 반해 더럽고 빽빽하던 노트는 너덜너덜했지만 좋은 성적을 남긴 채 버려졌습니다.




어떤 인생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아갈지 생각하던 중에 10년 전에 본 H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것은 찢어버리고,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제 인생이라는 노트만 보더라도 수많은 낙서엉망인 글이 많습니다. 가끔 밤에 엉망인 페이지가 열려 이불킥을 찰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찢어서 휴지통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인생은 진짜 노트처럼 찢어 버릴 수 없으니까요. 화이트로 지우거나, 빈 페이지를 열어 내용을 채우고, 공책 전체를 채워 새 공책을 꺼내는 게 빠를지도 모릅니다.



브런치북 역시 빈 종이에 글을 채우는 첫 도전이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에 설레하던 글, 흥미로운 글, 신나서 단숨에 완성했던 글이 있었지만 고쳐도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글, 유독 쓰기 힘들었던 글, 재미없는 글도 있었습니다. 좌절하지 않고 다음 주 연재 할 글을 썼습니다.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전체가 망한 건 아니었거든요. 그다음에는 더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실패했다고 인생이 망한 건 아니었습니다.


작은 실패를 쌓아 도전을 만들어 인생이라는 저만의 노트가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빽빽하고 너덜너덜한 노트가 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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