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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Dec 17. 2016

[소설] 내려놓음  81 면담Ⅵ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81 면담Ⅵ




 몸은 신경외과로 향해 걸어 나갔지만 머리는 온통 소견서에 관심이 쏠렸다. 그런 내 눈에 언뜻 한 단어가 보였다.


low grade


 기뻤다. 조직소견은 거지같이 나왔지만 위치만큼은 나쁘지 않다는 희소식을 보고 안 좋아할 이, 누가 있겠는가? 사실 저 단어가 내 상황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렇게 믿으면 되니까.


서류는 여기에 두시면 됩니다.
여기요.
음... 복무 중이시네요.
네. 공보의에요. 1년 남았는데 이렇게 되었네요. 당장 1년 뒤에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치료에 신경 쓰기도 모자라구만 지금 이러고 있습니다.


 아까 받은 푸대접이 마음에 남아 푸념을 늘어놓았다. 충분히 면제 받고도 남을 상황이기는 했지만 혹시 이 의사가 나를 가엽게 여겨 행정상에 편의를 더 봐줄 수 있도록 일 처리를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적잖이 들어있는 푸념이었다.

 의사가 건넨 서류를 들고, 지시한 곳으로 가 직원에게 서류를 내밀고 기다렸다. 직원이 서류처리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꽤 긴 시간을 뻘줌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얼마 뒤 직원이 중앙신체검사소를 예약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약도 꽉 차있고 서류작업도 하고 그래야 해서 3주 뒤부터 예약할 수 있어요. 언제가 좋으세요?
더 일찍은 안 되나요? 그때는 항암치료 1차가 막바지라서 제 몸 상태가 어떻게 되어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어요.
그건 안 돼요. 이미 TO가 다 찼어요.
그래도 방법이 머 없을까요?
네, 없어요.
만약에 그때 입원해서 못 가게 되면요?
다시 예약 잡으셔야죠.
제가 꼭 와야만 하나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에요. 만약에 입원하거나 못 가게 되면 어떻게 할까요?
여기로 전화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뇌종양. 그것도 교모세포종. 개두수술 이력 있음.

 이것으로도 충분할 텐데 무엇이 부족해서 또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게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오늘 한 것이라고는 서류 제출과 중앙신체검사소 예약뿐이다. 서류는 우편으로 보내고 검사소 예약은 전화로 하면 되는데, 왜 번거롭게 방문하도록 하는 것인가? 지극히 행정 편의에만 맞추어져 있는 시스템에 분노했다.


 ‘그리고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MRI를 다시 찍어야 해? 병원에 있는 게 정확하면 더 정확하지.’

 병원의 영상을 못 믿는 것이 분명하다. 병역 비리를 저지른 몇몇 고위층 때문에 애꿎은 일반인이 고생하는 현실에 화가 난다. 그래봤자 피할 놈들은 어떻게든 다 피할 텐데. 잔뜩 뿔이 난 채 병무청을 빠져나와, 밖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를 만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 나갔는데 집에 돌아온 시간은 6시가 넘어있었다. 얼마 뒤 뒤늦은 출근했던 어머니도 돌아오셔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날 밤 나는 몸살을 앓았다.



 신경외과 외래가 4주에 한 번 월요일에 있다면,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과의 면담은 30차 치료가 끝날 때 까지 매주 목요일에 있다. 간단한 문진과 CT 결과를 통해 일주일 동안의 변화를 체크하여 다음 주의 치료일정을 결정한다.


 그날도 늘 그렇듯 들어오자마자 간호사들에게 인사했다. 일어나 나를 맞이하는 간호사 뒤편에는 방사선 종양학과 전공의가 바삐 컴퓨터를 놀리고 있었다.

 ‘여기는 의국실이 따로 없나보네. 왜 여기서 일하고 있지? 그러고 보니 방사선 종양학과 전공의는 편하겠다. 입원환자도 없고, 응급 환자도 별로 없을 거고. 개원할 수 없다는 점만 빼면 삶의 질 좋네. 어차피 주말에는 방사선 치료 없고, 몸 쓰는 일은 방사선사가 다 하니까. 대신 월급이 적으려나?’


저기요. 환자분?
네?
몸무게 얼마인지 체크해보자구요.
아, 다른 생각 좀 하느라고... 저 아침에 쟀는데 다시 잴까요?
얼마였나요?
91.7kg 이요.
네?
91.7 이요.
네... 저번에는 91이지 않았어요?
아마 그럴 거예요. 저 몸무게 좀 늘었어요.
처음 봤어요.
제가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매일 2~3시간 운동하는데 이래요.
아, 네. 오늘은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알겠습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살이 빠지기는커녕 도리어 늘어났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면 의사든 한의사든 일반인이든 상관없이 놀라곤 했다. 방금 전 그 간호사처럼.




82 면담Ⅶ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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