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영화 남한산성
임진왜란이 끝나자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했다. 특히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약소민족으로 억눌려왔던 여진족이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세운 후금은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고, 명과 조선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후금을 누를 만한 힘이 명과 조선엔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지경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후금은 더욱 강해졌다. 누르하치(재위 1616~1626)를 이은 홍타이지(재위 1626 ~1643년)는 아버지보다 야심이 더 큰 인물이었다. 홍타이지는 왕으로 즉위한 다음 해인 1627년 후금은 조선을 침략하여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이 전쟁을 정묘호란이라 부른다..
‘형제의 맹약’은 조선이 대외적으로 청나라에 굴복하는 모습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인 내용에선 큰 손해를 보지 않았다. 화약(和約)에서 후금의 군대를 철수시키면서도 명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던 만큼, 조선은 내부적으로 후금에게 굴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금에게 치욕을 당한 만큼 갚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점점 더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물론 후금을 정복하기 위한 국방력 강화 등 실질적인 변화는 매우 작았지만 말이다. 후금도 조선과 전쟁을 오래 끌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을 형제의 관계로 묶어놓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 여겼다.
출처 : 영화 남한산성
그러나 조선과 후금은 풀리지 않는 앙금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과 후금의 차이가 있었다면 후금은 1636년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가 되었음을 세계에 알리는 강대국이 되었고, 조선은 실리보다는 명분만 찾으며 과거의 영광에만 매달렸다는 점이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였던 청을 오랑캐로 업신여기면서 말이다.
그러던 차에 청에서 용골대와 마부태가 조선에 사신으로 찾아왔다. 이들은 인조비 한 씨의 문상과 함께 청 태종의 존호를 알리는 과정에서 마치 조선이 속국이 되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이들은 청의 국력이 10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기에, 조선이 군신의 예를 갖출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조선은 오히려 이들을 더욱 감시하며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한 용골대와 마부태는 급하게 말을 훔쳐 청으로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평안도 관찰사에게 내려진 유문을 입수하여 청 태종에게 바쳤다. 이 유문은 의병모집과 병기 확충을 통해, 청의 침략을 철저히 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청 태종은 유문을 통해 조선이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재확인하고, 조선을 힘으로 굴복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명에게 충성하는 조선을 두고는 명을 정복하러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출처 : 영화 남한산성
1636년 12월 1일 청 태종은 12만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조선 정벌에 나섰다. 청 태종이 직접 조선 정벌에 나섰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이번 원정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해준다. 이런 청의 움직임을 조선은 알지 못했다. 청에 대한 분개함만 가득했을 뿐, 청의 동향조차도 파악하지 않았던 것이다.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청군의 선봉 마부태는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피해 빠른 속도로 서울로 남하했다. 조선 정부가 청의 침입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2월 12일 임경업 장군과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를 받고 나서였다. 13일 오후에는 청군이 평양에 도착했고, 14일에는 개성을 지나갔다는 소식에 조선 정부가 취한 행동은 종묘사직의 신주와 왕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 청군에 의해 막히자, 최명길이 청군에게 접대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남한산성이 청의 대군을 막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한 인조와 조선 정부는 15일 새벽 다시 강화도로 향했으나 매서운 바람과 눈길로 이동이 어려워지자 다시 발걸음을 남한산성으로 되돌렸다. 이로부터 추위와 배고픔으로 많은 이들을 죽음을 이끈 40여 일간의 항전이 이어졌다. 바로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