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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Jul 15. 2020

예송논쟁은 무엇이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선조 때 사림이 훈구파를 내쫓고 권력을 잡았다사림은 올바른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개혁의 우선순위와 방법이 달랐다훈구파를 먼저 척결하느냐아니면 피폐한 기층사회를 먼저 돌보느냐에 따라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었다물론 여기에는 학문과 인물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선조가 방계라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붕당의 갈등을 조장하기도 했으나 동인과 서인은 공존을 잘 유지하였다이후 붕당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공존이 되었다북인이 역사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발생했지만붕당의 공존이 깨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양난 이후 붕당의 공존이 점차 힘들어졌다정치적으로는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한 인조반정 이후서인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며 공존이라는 틀이 약해졌다경제적으로는 전란 이후 황폐해진 토지와 노비 감소로 삶이 곤궁해진 양반들이 관직에 집착하게 되었다이제 사대부들에게 있어 주요 관심사는 붕당을 통해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는 힘보다 대의명분이 더 중요했던 시절이다아무리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어도 효와 충에 있어서 예로서 행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상대 붕당을 견제하는데 예()만큼이나 좋은 수단이 없었다예를 알고 행할 수 있느냐는 국정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더욱이 예라고 하는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기에 불변의 원칙이 있을 수 없었다서인과 남인 모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예()가 선택되었을 때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었다예를 들어 제사에 올리는 음식의 위치를 두고 집안 어른들이 종종 다투는 것을 볼 수 있다요즘 젊은이들의 입장에선 어른들이 다투는 이유를 도통 이해할 수 없겠지만여기에는 집안 서열이 정리되는 치열함이 있다이때 자신의 주장을 관통시킨 사람이 집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으로 예송논쟁을 보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예송논쟁이란 서인과 남인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갖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조대비)의 상복 문제로 표출된 것이다자의대비는 인조가 44살일 때 15살의 나이로 시집을 왔다심지어 자의대비는 효종보다도 어렸다그렇다 보니 효종이 죽었을 때(1659)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일반 사대부의 예절 지침서인 <주자가례>에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부모는 삼 년을 입고차남 아래로는 1년을 입는다고 나와 있다반면 왕실의 예법을 규정해놓은 <국조오례의>에는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서인은 신권 중심의 사회로 만들고 싶었던 측면이 강했기에효종이 차남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사대부의 예와 같이 자의대비가 상복을 1년 동안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면 왕권을 강화해 서인을 견제하고자 했던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자로 간주하여 자의대비가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당시 왕으로 막 즉위한 현종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서인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결국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 자의대비가 1년상을 치르게 하였다이를 기해예송이라고 한다.

현종으로서는 기해예송은 매우 불쾌한 사건이었다기해예송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효종이 차남으로 규정되며자신의 정통성에 흠집이 생겼기 때문이었다그로부터 15년 뒤인 1673년 효종의 비였던 인선왕후가 죽자자의대비의 상복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서인은 효종비가 둘째 며느리이기에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남인은 맏며느리로 받아들여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를 갑인예송이라고 한다.



이때는 현종도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만의 정치적 색깔을 보여주며 왕권을 강화한 군주였다또한 자신과 세자를 위해서라도 왕위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현종은 남인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이로써 서인의 중심에 있던 송시열이 물러나고남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하지만 서인에 대한 견해 차이로 남인은 송시열을 강하게 처벌하자는 청남과 이를 반대하는 탁남으로 나뉘게 된다.
 
오늘날 예송논쟁을 두고 여러 주장이 나오고 있다이 시기를 붕당이 공존의 원리를 잘 지키던 시절로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이들은 소수의 의견이라도 소신 있게 주장하는 등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졌기에서인의 일당 전제화로 넘어가는 숙종 시절보다 낫다고 말한다반면양난 이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예송논쟁을 벌이느라 백성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하는 주장도 있다.
 
예송논쟁이 벌어지던 당시로써는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을지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안이었고모든 일의 시작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실리를 추구하는 오늘날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또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과학과 기술을 천시하는 풍토가 굳혀지게 되는 면에서 안타까움을 준다이처럼 예송논쟁은 누가 어떠한 상황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매우 달라질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지금의 우리는 예송논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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