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때 사림이 훈구파를 내쫓고 권력을 잡았다. 사림은 올바른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개혁의 우선순위와 방법이 달랐다. 훈구파를 먼저 척결하느냐, 아니면 피폐한 기층사회를 먼저 돌보느냐에 따라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학문과 인물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선조가 방계라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붕당의 갈등을 조장하기도 했으나 동인과 서인은 공존을 잘 유지하였다. 이후 붕당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공존이 되었다. 북인이 역사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발생했지만, 붕당의 공존이 깨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양난 이후 붕당의 공존이 점차 힘들어졌다. 정치적으로는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한 인조반정 이후, 서인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며 공존이라는 틀이 약해졌다. 경제적으로는 전란 이후 황폐해진 토지와 노비 감소로 삶이 곤궁해진 양반들이 관직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제 사대부들에게 있어 주요 관심사는 붕당을 통해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는 힘보다 대의명분이 더 중요했던 시절이다. 아무리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어도 효와 충에 있어서 예로서 행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상대 붕당을 견제하는데 예(禮)만큼이나 좋은 수단이 없었다. 즉, 예를 알고 행할 수 있느냐는 국정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더욱이 예라고 하는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기에 불변의 원칙이 있을 수 없었다. 서인과 남인 모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예(禮)가 선택되었을 때, 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제사에 올리는 음식의 위치를 두고 집안 어른들이 종종 다투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의 입장에선 어른들이 다투는 이유를 도통 이해할 수 없겠지만, 여기에는 집안 서열이 정리되는 치열함이 있다. 이때 자신의 주장을 관통시킨 사람이 집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으로 예송논쟁을 보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예송논쟁이란 서인과 남인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갖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조대비)의 상복 문제로 표출된 것이다. 자의대비는 인조가 44살일 때 15살의 나이로 시집을 왔다. 심지어 자의대비는 효종보다도 어렸다. 그렇다 보니 효종이 죽었을 때(1659)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일반 사대부의 예절 지침서인 <주자가례>에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부모는 삼 년을 입고, 차남 아래로는 1년을 입는다고 나와 있다. 반면 왕실의 예법을 규정해놓은 <국조오례의>에는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서인은 신권 중심의 사회로 만들고 싶었던 측면이 강했기에, 효종이 차남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사대부의 예와 같이 자의대비가 상복을 1년 동안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왕권을 강화해 서인을 견제하고자 했던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자로 간주하여 자의대비가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 왕으로 막 즉위한 현종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서인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 자의대비가 1년상을 치르게 하였다. 이를 기해예송이라고 한다.
현종으로서는 기해예송은 매우 불쾌한 사건이었다. 기해예송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효종이 차남으로 규정되며, 자신의 정통성에 흠집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673년 효종의 비였던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서인은 효종비가 둘째 며느리이기에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맏며느리로 받아들여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갑인예송이라고 한다.
이때는 현종도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만의 정치적 색깔을 보여주며 왕권을 강화한 군주였다. 또한 자신과 세자를 위해서라도 왕위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현종은 남인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로써 서인의 중심에 있던 송시열이 물러나고, 남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 하지만 서인에 대한 견해 차이로 남인은 송시열을 강하게 처벌하자는 청남과 이를 반대하는 탁남으로 나뉘게 된다.
오늘날 예송논쟁을 두고 여러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시기를 붕당이 공존의 원리를 잘 지키던 시절로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소수의 의견이라도 소신 있게 주장하는 등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졌기에, 서인의 일당 전제화로 넘어가는 숙종 시절보다 낫다고 말한다. 반면, 양난 이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예송논쟁을 벌이느라 백성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하는 주장도 있다.
예송논쟁이 벌어지던 당시로써는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을지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안이었고,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리를 추구하는 오늘날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과학과 기술을 천시하는 풍토가 굳혀지게 되는 면에서 안타까움을 준다. 이처럼 예송논쟁은 누가 어떠한 상황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매우 달라질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지금의 우리는 예송논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