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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r 30. 2021

5군영 체제로 나라를 지키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맞아 싸워야 할 군인들이 도망가면서 군체제가 무너졌다. 조정은 류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앙군을 확충하기 위해 1593년(선조 26년) 급료를 지급받는 군인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을 만들었다. 훈련도감은 5군영 체제에서도 가장 중요한 군영으로 국왕을 호위하고 도성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훈련도감이 중앙군의 핵심 부대인 만큼 1602년(선조 35년)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에서 거둔 삼수미를 부대운영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훈련도감은 자체적으로 무기장 운영과 둔전 경영이 허락되었다.
 
훈련도감은 조총부대인 포수, 창검을 사용하는 살수, 활을 쏘는 사수로 구성되었고, 훈련도감에 배속된 군인을 도감군이라 불렀다. 훈련도감의 정원은 1천 명에서 시작하여 5천 명까지 늘어났다. 도감군은 매달 4~9말의 쌀을 급료로 받았으며, 신분은 유생부터 노비 그리고 승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지원하기도 했지만, 출세나 면천되기 위해 몰려든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재정이 부족하여 급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자 도망가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각 지방에 의무적으로 도감군을 배정하여 차출하는 승호제로 바꾸었다. 지방에서 도감군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오는 경우 가족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복무하고 받는 급료로는 가정을 꾸리기 어려워 부업으로 장사하는 도감군도 있었다.
 

훈련도감을 제외한 나머지 5군영 중 어영청은 1623년(인조 1년) 이괄의 난 때 공주로 피난 간 인조를 호위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앙군으로 수도 방위와 왕의 호위를 맡았다. 총융청은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서울을 빼앗긴 경험을 바탕으로 적군이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기도 일대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수어청은 1626년(인조 4년) 남한산성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가 병자호란 이후 별도의 군영으로 독립하여 중앙군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금위영은 1682년(숙종 8년) 병조 관할 아래에 있던 정초군과 훈련도감의 별대를 통합하여 왕과 수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수어청‧금위영 5군영은 조선 후기 국가를 안보를 담당하는 중앙군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붕당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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