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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호 May 23. 2023

김육이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다.

양난 이후 조선을 유지해 준 제도를 찾는다면 많은 사람이 대동법이라고 말합니다전쟁으로 농경지가 황폐해지고인구가 크게 감소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선택한 조세제도는 감세였습니다우선 조세 감면은 부유한 사람에게는 큰 이익을 남겨주어 조세저항을 피할 수 있습니다가난한 사람에게는 국가가 애민 정신을 가지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조세 감면 정책으로 대표적인 것이 인조 때 실시한 영정법과 영조가 시행한 균역법이 있습니다풍흉에 상관없이 토지 1결당 4~6두만 징수하는 영정법의 경우 지주에게 큰 이익을 주었습니다예를 들어 1,000결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지주는 최대 20,000두를 세금으로 내야 합니다그러나 영정법이 적용되면 지주는 4,000두만 세금으로 납부하면서 16,000두의 이익을 얻게 됩니다반면 보유한 토지가 적거나 없는 사람은 받는 혜택이 매우 적거나 없습니다균역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만큼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하지만국가도 재원이 있어야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만큼 지주나 양반에게 결작이나 선무군관포로 부족분을 보충했습니다문제는 지주와 양반들은 자신이 내야 할 세금을 소작농에게 전가했고정부는 이를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대동법은 달랐습니다영정법과 균역법처럼 조세 감면이 아니라가진 사람이 세금을 더 내게 하는 조세제도였습니다또한 지역 특산물이 아니라 돈··포 등으로 공물을 납부하도록 하여 방납의 폐단을 제거했습니다방납이란 관리나 상인이 권력을 이용하여 강제적으로 공물을 백성 대신 납부하고 이자를 받는 관행으로국가 수입을 감소시키며 백성의 삶을 파탄 내는 사회 문제였습니다당연히 지주와 양반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동법이 자신이 사는 지역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동법이 광해군 때 처음 시작되었지만그전에도 대동법과 비슷한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있었습니다바로 율곡 이이입니다이이는 황해도 해주와 송화 등지에서 토지 1결당 1두씩의 쌀을 거두어 공물을 납부하며 얻는 이익을 보고는 전국의 모든 공물을 쌀로 걷자는 대공수미법을 건의했습니다하지만 훈구파들과 결탁한 대상인들의 반대로 대공수미법은 시행조차 되지 못했습니다대공수미법이 시행된 것은 이로부터 20여 년 뒤인 임진왜란이었습니다부족해진 군량미를 확보하는 방편으로 류성룡의 건의로 시행되었으나이마저도 전쟁 중에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려는 권세가와 대상인으로 인해 1년도 안 되어 폐지되고 맙니다


대동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광해군 때였습니다호조참의 한백겸이 대공수미법 시행을 제안하고당시 영의정이던 이원익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이원익은 방납인에 의해 물건 가격이 몇 배에서 몇백 배가 되어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지적하며 광해군에게 거듭 시행을 촉구하였습니다광해군은 이원익의 제안을 받아들여 경기도 지역에 한하여 대동법 시행을 허락했습니다이때 광해군이 내린 전교 가운데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어 대동법은 선혜법이라고도 불리게 됩니다


중앙에 선혜청과 지방에 대동청을 만들고지방 관리들에게도 시행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이런 노력이 백성과 국가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 증명되자곽재우 등 뜻있는 사람들은 연신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사헌부도 대동법이 가져온 효과가 크다며 조선 8도에 시행하자고 주장했으나광해군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아마도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이 양반과 지주층의 반발을 일으켜 왕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또는 전쟁으로 땅 소유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대동법을 시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시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이도 아니라면 궁궐 공사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붓는 등 예전의 현명했던 광해군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대동법의 진가를 아는 사람들이 광해군 쫓겨난 뒤에도 계속 시행을 주장했습니다인조는 조익(1579~1655)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했습니다그러나 2년 뒤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대동법이 폐지됩니다여기에는 지주들의 반발과 함께 인조와 서인 세력이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충성심으로 받아들인 것도 한몫합니다일례로 서성은 대동법은 중국 양세법을 따라 만든 것이지만우리나라는 맞지 않는 제도입니다신이 호조를 맡아 볼 적에 과거의 공법은 매우 간략했는데지금은 복잡합니다그 지역의 특산물로 공물을 바치게 하지 않고 전결로만 내게 한다면 민생들이 어찌 고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습니다그래도 다행인 것이 조익과 이원익 등 일부 관료들이 대동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효종이 즉위하자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밀어붙였습니다우의정 김육은 대동법은 지주보다는 일반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조세제도입니다대동법 시행이 한 두 가지 불편하다고 멈추면 아니 되옵니다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아니라면 신에게 죄를 주소서.”라며 자신의 일신을 생각하지 않고 국가와 백성만 생각했습니다하지만 모두가 김육과 같은 생각을 갖지는 않았습니다오히려 대동법 시행이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하는 것을 꺼려하며무슨 일이 있어도 대동법 시행을 저지하려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결국 이를 두고 집권층이던 서인은 둘로 나뉘어졌습니다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김육·조익·신면 등은 한당이 되었고대동법 시행을 반대한 김집·송시열·이기조 등 다수는 산당이 되었습니다시간이 흐를수록 대동법 시행의 효과가 분명하게 나타나자효종 2년에는 충청도로 확대되었습니다효종 9년에는 전라도 연해 지역 27개 군현에 시행되었고현종 3년에는 산군(山郡)까지 적용되었습니다그리고 숙종 34년인 1708년에는 황해도까지 시행되면서대동법은 100년 만에 전국적으로 시행되게 됩니다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며 국가 재정도 튼튼하게 만들어주었던 대동법은 조선 후기 경제를 많이 변화시켰습니다조정은 필요한 물건을 직접 구입하자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貢人)이 등장했습니다공인은 수공업자에게 물건을 만들 비용을 먼저 주고 제작하는 선대제를 시행하면서 상업 자본주의의 모습이 조선 후기 등장하게 됩니다이로써 조선은 외부의 영향 없이 자본주의가 발달하며 근대화를 향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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