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그대로 바라볼 용기가 자존의 시작이다
집에 거울이 있는가? 한번 바라보자. 어떤 표정이 당신을 보고 있는가? 얼굴엔 당신에 대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을 테다. 눈빛은 어떤지, 표정은 밝은지, 주름이 보이는지, 얼마나 피로한지 등 다양한 정보가 보일 것이다. 얼굴에서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확대한다면 훨씬 더 많은 정보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면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있다고 한다면 극단적 나르시시스트가 아닐까? 삶까지 앗아가 버릴 정도로 자신의 모습에 심취했던 우물가의 요정 같은 존재는 신화 속에서나 존재한다. 자신을 바라볼 때, 실제보다 좋게 보려는 노력보단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있는 그대로 볼 때, 장점만 아니라 단점도 함께 볼 수 있다. 그 다음 필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두 단어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영어 독해할 때만 중요 문장을 구분하기 위해 자주 썼고, 삶에서는 별로 적용하지 않았다. 이 두 단어는 자존의 시작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모든 측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한다는 마음이 자존의 시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한 시선은 지극히 객관적이다. 양면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진다면 삶이 조금 더 균형 잡히고 마음이 편할 것이다.
양면을 가지지 않은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자화상은 건강하다. 앞으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기에 가식적이지 않고 솔직하다. 자신에게 솔직하면 타인에게도 솔직할 수 있다. 그런 건강한 자아 인식은 자존감으로 연결된다.
부족한 자신의 측면을 인정하고 나면 배울 수 있다. 배우면 나아질 수 있다. 묵혀두고 외면했던 자신의 부분은 뜻밖의 곳이나 상황에서 튀어오르게 마련이다. 이래야 했던 자화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그리는 순간 우리는 자아에 대한 이상과 관념의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래야 하는 나는 없다. 오직 이런 나가 존재할 뿐이다. 이럴 나는 현재의 이런 나가 쌓여서 된 결과물이다. 이런 나에 집중하면서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이랬던 나와, 이럴 나는 이런 나의 과거, 미래형일 뿐이다. 자화상은 지금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일 수밖에 없다.
남들이 보는 나의 자화상은 자화상이 아니다. 타화상이다.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은 타인의 수만큼 다양하다. 그 다양한 수의 시선에 일일이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 바라보는 내가 정립되지 않았는데 타인의 시선에 휩쓸린다면 우리는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오직 내가 나를 알고 난 이후에야 우리는 자화상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 어떤 일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 어떤 상황과 사람을 싫어하는지 말이다. 자화상을 그려보자. 자신만의 자화상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도 그 모습을 긍정할 수 있는 시선이 우리를 자존이라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균형잡을 수 있는 중립 지역으로 안내할 것이다. 자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단어가 담긴 자화상을 갖도록 하자. 타인이 규정하는 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