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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Dec 01. 2024

착하게 살자

 착하다.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던 단어 중 하나다.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를 보면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녀석이다. ‘성품이 착하고 바르며 학급에 모범이 됨’ 내가 무슨 객관식 인간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같은 말로 나를 표현하곤 했다. 학년이 올라가도 학급이 바뀌어도 심지어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4지선다 중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여전히 ‘착하다’였다.


오히려 미련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묵묵히 그 일에만 집중했다. 스스로가 아닌, 착하다거나 바르기 살기 위해 대쪽같이 서서는 군말 없이 했던 것 같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고 우직하다거나 듬직하다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또래가 봤을 때는 미련함이나 바보 같음에 더 가까웠으리라. 방과 후 선생님이 잠시 보자고 하고 그냥 퇴근했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해가 저물기까지 그 자리에서 2~3시간을 기다리던 기억이 있다. 다른 선생님이 그 선생님에게 전화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집에도 못 가지 않았을까.


슬슬 착하다는 것에 멀어지고 싶다. 요즘 들어 더 악동이 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그동안 착했으니 나쁘게 살자가 아니다. 단지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자가 목표다. 스스로 법규와 규칙과 도덕적 책무까지 지키느라 뼈가 삭을 지경이다. 엉뚱한 곳에 힘 빼고 싶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용쓰고 싶지 않다. 나를 버려가며 남을 돕고 살고 싶지도 않다. 어쩌면 예전만큼 넘치지 않는 기력을 의식하는 방어기제 같기도 하다.


간혹 잘 산다라는 말에 정의를 스스로 내리곤 한다. ‘잘’이라는 단어에는 많은 뜻이 있다. 매끄럽게, 아주 좋게, 뛰어나게 등 사전적인 의미는 얼마든지 있다.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유년시절부터 아빠에게 늘 들었던 말이 있다. 어떤 경우에서도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음식점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집에서도 소리를 지르거나 피해 주는 행동은 삼가야 했다. 그때도 의심은 했었다. 다른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뛰어다녀도 괜찮은 경우를 자주 봐왔으니까. 그런 모습을 보고 아빠는 꼭 한마디 하셨다. 부모가 누구냐고, 어떻게 애들이 버릇없이 구는데 그냥 두느냐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떠드는 아이 한번 그의 부모 한번 흘기곤 하셨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아빠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아이들 목소리가 클수록 미간에 주름은 선명했다.


그렇게 어른으로 틀이 굳어버린 듯하다. 중간에 적당히라는 말로 타협할 기회는 있었지만 적용하지 못했다. 그냥 이대로가 좋았다. 나만 좀 참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까. 희생이라는 값만 넣으면 주변은 언제나 평온으로 답해왔다. 희생은 스스로가 그 어떤 선도 넘지 않는다는 약속과 매번 그 선에 위치를 확인해야 하는 무의식이 선행되어야 했다. 한 번이라도 그 선을 넘지 못했다. 시도는 있었지만 넘었을 때 죄책감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바보가 따로 없다. 착하다는 게 이래서 바보 소리를 듣는구나 한다.


어느 날 퇴근길. 모처럼 반차 쓰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출퇴근 억장을 무너지게 할 만큼 교통 체증이 반복되는 곳에 신호를 받고 섰다. 횡단보도는 초록불임에도 한산했고 황량했다. 오히려 차와 사람이 없는 이유에 대해 묻고 싶을 정도. 반차가 주는 낮기운에 취한 채 여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10톤가량 되는 대형 화물차가 어느덧 뒤로 다가왔다. 느닷없이 짧게 빵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신호가 바뀌었는데 가지 않았나 싶어 급하게 액셀을 밟았다. 차가 반쯤 통과할 찰나 신호를 봤더니 여전히 빨간색이었다. 순간 다시 브레이크를 밟았다. 뒤차는 이제 더 크게 빠~앙 했다. 나도 모르게 십 원짜리 욕을 뱉어댔다. 차창 밖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욕을 하고 있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그들은 왜 신호를 지키지 않는가 보다, 신호를 지킨 내가 더 마음이 불편한지에 대해. 억울한 심정이지만 트럭운전사 나름에 입장도 고려해 본다. 오히려 내가 특별한 인간이고 그가 더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그는 착하지 않지만 미련하지도 않아서 스스로 아프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날 많은 생각을 했다. 다음에도 같은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나도 신호를 위반해야 하나? 본디 자리를 지키면 되나?


나는 아직도 규칙이냐 미련함이냐, 융통성이냐 답답함이냐를 오가는 중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 혼란스럽다. 지금껏 지키고만 살아온 삶에 일침을 날리기 위해 누군가 편입한 교육과정 같다. 예고 없이 진척된 진도에 화가 났지만 싫지만은 않다. 깨우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금껏 겪어온 모순에 대해 과거를 되짚어 보는 중이다. 마음 가는 대로 산다는 것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는 중일지도. 어쩌면 나는 착하거나 미련하지 않을지 모른다. 매번 착한 짓 코스프레를 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던 거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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