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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여행을 가고 싶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행을 하면 지금 나를 간지럽히던 허기가 채워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영향일 수도 있다. ‘여행의 이유’라는 책 제목만큼이나 여행에 대한 갈증을 부추기고 있었다. 여행을 장려하는 책도 아니었다. 단지 여행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동기부여는 충분했다. 그것은 나도 한번 해보면 좋겠다가 아니었다. 하지 않으면 헤쳐나갈 수 없음에 대한 확신이었다.


현실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조차 갑갑하다. 7월 초입에 맛본 더위에 어이가 상실된 이유이기도 했다. 세상이(대구가) 더위에 미쳐 돌아가니까 나도 같이 미쳐가도 된다는 사실에 조금 위안이 될 뿐.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이 더위와 답답함을 견디고 살아가는 것일까. 모두가 다른 듯 비슷하게 겪고 있지만 인내로 버티고 있는 듯했다. 나는 다른 사람이고 싶었다. 삶이라는 굴레가 선사하는 말도 안 되는 교육과정에 땡땡이치고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 개근상이 비웃음 거리가 되어버린 지금에서 어떻게든 어긋나 보겠다는 의지가 우선시되는 이유다.


나에게 여행이란, 잘 짜인 현장학습 같은 것이었다. 출발시간, 도착시간, 숙소, 주변에 먹거리와 볼 것들까지. 모든 것이 계획안에 있어야 했다. 알차게 보고 즐겨야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다. 옛 어르신들 말씀처럼 ‘뽕을 뽑아야지’와 같은 말로 빗나가는 상황을 차단하려 했다. 여행에서 꼼꼼함이 여유를 앞지르면 부작용이 나타난다. 조금 더 힘든 일상의 연장선일 뿐.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바라던 여행의 순기능이 아니었다.


계획된 여행은 그만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MBTI부터 물어보더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행복하다 했지만, 너무 잘 짜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여행의 포만감을 반감시켰다. 유년기 여름방학 시작 때가 떠오른다. 방학은 좋았지만 계획은 싫었다. 탐구생활 첫 페이지를 넘기면 하루 일정을 그려 넣어야 했다. 컴퍼스로 둘러쳐진 테두리 안에서, 자로 선을 그으며 기상과 식사, 공부, 휴식, 세면까지도 분단위로 끼워 넣었다. 이대로 생활하면 숨 막힐 듯했다. 하루를 있는 그대로 놀 수 있는 자유 시간이 몇 시간 안 된다며 엄마에게 악을 쓰며 분풀이했던 기억이 있다.


어른이 되면서 다시금 그때의 하루 일정표가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른이 되었으니 정해진 일정대로 일하고 쉬어야 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 아니면 어렸을 때 그때로 돌아가 다른 동네를 기웃거리며 탐험이라 부르던 때가 그리운 것일까? 어른이 되어도 자유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우두커니 놓여있는 세상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형국이다. 어느 국민학생의 반항끼가 아직도 머릿속 이곳저곳을 떠돌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에 고개를 갸웃한다. 그냥 훌쩍 떠나기만 한다면, 그럴 용기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언젠가 책에서 본 적 있다.

“세상이 그리 넓다는데, 제가 한번 가보지요”


중국 허난성에 한 교사였던 구사오창의 사직서다. 단 한 문장으로 여행이 가진 본질과 여유, 이유를 모두 아우른 문장인 듯하다. 아마 다음 세기까지 이보다 더 나은 문장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사직서를 낸다는 용기마저 대단한데, 거기에 더해 세상이 넓기 때문에 여행을 위해 사직서를 낸다니. 사직서를 받는 입장에서는 황당하겠지만, 이를 반박할 이유는 찾지 못할 것 같다. 세상이 그리 넓은지 그는 가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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