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권태에 축 늘어져 있다 보면, 꼭 습관처럼 하게 되는 행동들이 있다. 내 경우에는 괜스레 지난 일기들을 들추어 보는 일이다. 나의 일기는 사실, 전형적인 일기라기보단 그때그때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써놓은 감정의 쓰레기통에 가깝다.
도저히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나, 현재로선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을 끄적여 놓은 것이다. 그렇게 버리기엔 아깝지만, 머릿속에 담고 있기엔 부담이 되는 이상한 것들이 내 피씨에는 잔뜩 쌓여 있다. 그리고 한 번씩 그걸 되짚어 보는 날에는 얼마간의 따분함 정도는 가뿐히 잊을 수 있다.
음, 해리 포터에 나오는 펜시브를 연상해도 좋을 것 같다. 하얗고 기다란 빛줄기를 관자놀이에서 천천히 뽑아내는.
일기는 작가와 독자가 일치하는 거의 유일한 글쓰기다. 그래서 보통은 쓰고 나면 수정하는 일이 없다. 누구에게 잘 보일 글도 아니고, 다소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나만 알아볼 수 있다면 문제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걸 퇴고를 하듯 하나씩 표현을 다듬기도 하고, 그즈음의 나를 상상하며 불분명한 글들을 좀 더 뚜렷이 하는 작업을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간혹, 처음의 글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과정이 꽤 즐겁기 때문에 포기할 순 없다. 지금은 잘 실감도 되지 않는 묵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아주 지극히 사적이고 솔직한 감정을 다시금 체험하는 일 자체가 좋다.
물론, 그렇게 정돈된 글마저도 누군가에게 보이는 날에는 나는 아마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과거의 모습을 한 번씩 돌아보며 나는 대체로 위안을 받는 편이다. 그때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을 듯 보였던 상황도 이미 과거인 것이다.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처럼 맘 편히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오래 전의 나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지금을 발견하는 날에는 그만큼 실의에 빠지기도 한다.
인생에 시간이 더해지면 당연히 더 나은 삶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시간들을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제자리를 맴도는 나를 보면, 말할 수 없는 슬픈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위험조차도 감수할 만큼 과거로의 여행의 중독성이 강한 셈이다. 맨 정신으로는 보기 힘든 수많은 낯간지러운 표현들을 볼 때면, 당장 삭제 버튼을 누르고 싶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과거의 나는 멀게만 느껴진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먼 나라의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처럼, '아, 그땐 그런 상황이셨군요. 정말 그랬겠어요.' 하며 공감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한 남의 일처럼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어쩌면 무용할지도 모르는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한숨만 늘어가는 내 모습이 또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지금은 별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은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