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1(목)
잠들기 전에는 좋았는데 잠들고 나니 서윤이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잠결에도 혹시나 서윤이를 쳐서 깨우지는 않을까, 나한테 깔려서 숨이 막히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다 처음 깬 게 4시였다. 시간을 확인할까 말까 하다가 봤는데 다행히 4시였다. 2시간이나 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눈을 감았는데 금방 또 깼다.
“엄마하. 엄마하. 쉬 마려워여어”
“어, 갔다 와”
아내와 시윤이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시윤이는 정말 많이 마려웠는지 한참 동안 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온 시윤이가 아내에게 다시 속삭였다.
“엄마하. 엄마하. 손가락 빨아도 돼여허?”
“어”
슬쩍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봤는데 5시 40분이었다. 다소 절망적이었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아직 20분이나 남았네. 잘하면 잠들지도 몰라’
그냥 일찍 일어날까 고민도 했는데 몸이 안 움직였다.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다 떴더니 5시 57분이었다. 시윤이는 아직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고 손으로 인사를 나눴다. 시윤이도 고개를 들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윤아. 안녕. 좀 더 자고’
‘아빠 안녕. 잘 갔다 와여’
아내는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냈다. 오전에는 기도 모임도 하고 오후에는 아이들과 공부도 하고. 퇴근 시간 무렵에 전화가 왔다. 아내가 아니라 소윤이가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를 했다.
“아빠. 있잖아여. 오늘 엄마가여 저녁을 준비할 수가 없대여. 그래서 아빠가 피자를 사 줘야 된대여”
아내와 소윤이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들어가는 길에 내가 찾아갈까 아니면 아내가 아이들과 찾으러 갔다 올까를 두고 얘기하는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기들이 찾으러 갔다 오자며 아내에게 졸랐다.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서윤이는 엄청 애틋하고 애절하게 아빠를 불렀다. 수도 없이.
“압빠아아아아. 아빠아? 압빠아앙. 아빠아아아아. 아빠아아아아아아. 압빠빠아아아아”
다양한 억양과 박자로 아빠를 찾았다. 그렇게 애틋하던 녀석이 막상 집에서 만나면 5초 반갑고 나서는 내려 달라고 난리다. 막 껴안고 부비고 그래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긴 하지만 먼저 달려드는 게 좀 줄었다. 어색한 장소에 가거나 어색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를 떠나지 않을 거면서.
소윤이는 오늘 영어 연습을 20번이나 했다고 했다. 정확히 뭘, 얼마큼 했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뭔가 열심히, 많이 연습했다는 것 같았다. 옆에서 아내도 ‘엄청 많이’ 한 거라며 치켜세웠다.
“오? 진짜? 그 정도면 엄청 열심히 노력한 거 아니야? 대단하네”
“아빠. 너무 많이 해서 입술이 다 찢어질 정도였어여”
“진짜? 입술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니야?”
“진짜 힘들었어여”
과장이 아니라 정말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열심히 했다는 말이었다. 나를 닮아서 엉덩이가 가벼운 아이로 태어났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꼭 일찍 배웠으면 좋겠다. 시윤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소윤이가 아내와 씻는 동안 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때 질문을 엄청 많이 했다. 오늘의 주제는 ‘각종 동물의 서식지와 먹이사슬’이었다.
“아빠아. 저는 숲에 가 보고 싶은데 못 가여. 뱀이 많아서”
“우리 숲 가 봤잖아”
“우리가여? 언제여?”
“그때 서울숲 가 봤잖아”
“아 뭐에여. 그런 숲 말고여”
“그래? 그럼 어떤 숲?”
“아, 지이이인짜 나무가 많아서 길이 없는 그런 숲”
“아, 그런 데는 아빠도 거의 안 가 봤지”
“풀 밟고 가야 되고 그런 데를 가 보고 싶어여. 근데 뱀이 많져?”
“그런 데는 뱀이 많겠지”
이런 대화를 시작으로 뱀은 왜 사람을 공격하는지, 표범은 나무에 잘 올라가는지, 뱀이랑 상어랑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상어는 물 밖에서 살 수 있는지, 악어는 물 밖에도 나오는지, 뱀은 물속에 살 수 있는지 등을 참 많이 물어봤다. 최대한 성의 있게, 아는 한도 안에서 정확한 답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윤이와 그런 대화를 나누는 게 나도 재밌었다.
다들 참 피자를 잘 먹었다. 막내 서윤이부터 나까지. 아내가 제일 조금 먹은 느낌이었다. 서윤이를 위해 밥을 새로 했는데 정작 밥은 거의 안 먹었다. 피자의 빵 쪼가리를 너무 잘 먹어서.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은 피자가 좀 먹히는 날이었는지, 마지막까지 꽉 채워서 잘 먹었다.
아내가 애들을 재우러 들어가고 나서 싱크대를 봤는데 설거지가 하나도 없었다.
‘저녁에 피자를 먹어서 그런가’
오늘도 애들을 재우다 먼저 잠든 아내가 뒤늦게 깨서 나왔다. 엄청 지치거나 힘들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단해 보이기는 했다.
“아, 오늘은 뭔가 엄청 힘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설거지도 계속하는 느낌이고. 왜 이렇게 지겨운지”
아내의 짧은 소감(?) 속에 공허한 싱크대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설거지가 왜 없긴. 아내가 다 했으니까 없지. 아내는 잠시 바닥에 있는 옷을 치우고는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난 아내가 뭘 꺼내 올지 알고 있었다. 아내는 빵을 들고 나왔다. 아내가 웃는 나를 보며 물었다.
“왜?”
“아, 그냥. 요즘 거의 1일 1빵이네?”
“너무 성실해?”
“그러게. 성실하네. 착실하네”
아내는 영어 교재와 노트북을 펴고 식탁에 앉아서 빵을 베어 물었다.
“아이”
“왜? 맛이 변했어?”
“그새 눅눅해졌네. 아까 바로 한 입 먹었어야 됐는데”
“이야, 거의 빵믈리에네”
아내는 내일 아이들 가르칠 자료를 열심히 만들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