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13(목)
어제는 전의를 상실했던 아내가 오늘 아침에는 다시 각성하고 열심히 정리와 청소를 했다고 했다. (내) 엄마는 오후에 일이 있어서 가야 했기 때문에 아침에 엄청 일찍 오셨다. 덕분에 아내도 엄청 바빴을 거다. 오시기 전까지는 정신없이 바쁘지만 오시고 나면 한결 여유가 생긴다. 그래도 시어머니니까 친정 엄마와 같은 막역한 편안함은 아니겠지만 든든한 육아 지원군인 건 틀림없다.
날씨도 춥고 해서 어디 나가지 않고 계속 집에만 있었다고 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빨리 내일 아침이 됐으면 좋겠다’던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마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야속했을 거다. 요즘 둘 다 ‘시간의 상대성’에 관한 소감을 많이 얘기한다.
“아빠. 놀거나 주말에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데 공부하거나 기다릴 때는 시간이 너무 안 가여”
그래도 오늘은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조금 더 늘었다. 아내가 엄마를 지하철역까지 모셔다드린다고 했는데, 그게 우리 집 근처 지하철역이 아니었다. 차로 20-30분 정도 거리니까 엄청 먼 건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아쉬움을 달래기에 턱없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마침 거기가 아내의 친구 집 근처였다. 아내는 친구에게 커피 한 잔을 사다 주고 돌아갈 생각이라고 했다. 한 시간쯤 뒤에 아내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잠깐 커피만 주고 가려고 했는데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는 거다.
“나에게는 햄버거 세트 이용권이 있습니다. 먹고 와”
얼마 전에 라디오 퀴즈 맞혀서 받은 햄버거 교환권으로 ‘남편을 내팽개치고 친구네서 저녁 먹는 게 미안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아내의 마음의 부담을 덜어줬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원래 커피만 주고 가려고 했는데 소윤이와 시윤이가 ‘바로 가는 건 너무 아쉽다’고 했다. ‘딱 10분만’ 있다 가기로 하고 들어갔고 아내 친구의 딸은 어린이집에 있었다. 아내의 친구는 아내에게 아주 비밀스럽게 ’00(딸) 올 때까지 있다가 저녁을 먹고 가’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눈치코치가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소윤이는 이걸 바로 알아차렸고 결국 저녁도 먹게 된 거다.
집으로 오는 길에 햄버거 가게에 들러서 햄버거를 샀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는 건 왠지 너무 처량해 보여서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다 먹었다. 쓰고 보니 이게 인과 관계가 맞게 설정된 건가 싶네. 그냥 배고파서 일찍 먹은 건가.
아무튼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와 아이들을 기다리며 쉬었다. 저녁까지 먹었으니 꽤 늦은 시간에 왔다. 자녀들은 내가 밖에서 들어와도 반겨 주고 안에서 기다려도 반겨 준다. 세 녀석에게 차례로 포옹과 뽀뽀를 건네고 나서 생각했다.
‘부지런히 씻기고 재울 준비해야겠네’
아내가 나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여보. 애들 다 씻겨서 왔어”
“진짜? 대박이네”
나도 모르게 엄청 기쁘게 대답했다. 손만 씻겨서 재우면 된다니. 새로 밥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아직 밥솥에 밥이 넉넉하게 남은 걸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과 비슷했다. 시윤이는 아까 낮에 할머니와 할리갈리를 했는데 할머니가 나갈 시간이 돼서 끝까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까 마무리를 못했으니 ‘지금 딱 한 판만 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그래. 한 판 하고 자자”
할리갈리는 아직 아이들이 나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도 재밌게 했다. 정말 딱 한 판만. 고급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전채 요리처럼, 아주 맛있지만 감질나고 아쉽게(고급 레스토랑은 가 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주 즐겁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