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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May 29. 2023

아내의 연출력

23.01.26(목)

K의 첫째와 시윤이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매우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둘 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곧 K의 둘째와 소윤이, K의 막내와 서윤이도 거실로 나왔다. 다들 머리는 뻗치고 눈은 퉁퉁 부은 채로 졸린 눈을 비벼가며 나왔다. 다들 기침도 많이 하고 콧물도 줄줄 흐르는 상태라 어제 자기 전에


“내일 일찍 일어나지 말고 늦게까지 좀 자”


라고 얘기했는데 역시나 무용지물이었다. 두 살부터 아홉 살까지 연령대도 고른 여섯 명의 자녀들은 거실에 둘러앉았다.


식탁에 삶은 계란 여섯 개가 있었다. 아내들이 자녀들 먹으라고 삶아 놓은 거라고 생각했다. 자녀도 여섯 명, 계란도 여섯 개. 자녀들은 계란을 하나씩 쥐고 까기 시작했다. 나와 K는 나가야 했다. 엄마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계란은 의외로 후폭풍이 큰 간식이다. 그대로 두고 나가면 꽤 거창한 난장이 벌어질 것 같긴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뒤에 벌어질 일이 아무리 처참(?)하더라도, 어쨌든 그 순간은 퍽 보기 좋았다. 여섯 명의 어린 녀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계란을 오물거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뒷일은 아내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출근했다.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계란은 나와 K를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꽤 손이 가는 계란 참사가 벌어졌고.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던가. 혼자 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여러 모로 소진되었을 텐데, 동지(K의 아내)와 함께하니 감정 절제력도 높아지고 고통도 나누게 되는 효과도 있는 듯했다. 아내는 유쾌하게 계란 참사의 현장을 전했다.


K의 아내와 자녀들은 일찌감치 떠났다고 했다. 나도 나지만 아내도 무척 피곤했을 거다. 오히려 밖에서 일을 하면서 움직이면 졸릴 틈이 없지만, 집에서 아이들과 있으면 수시로 졸음이 몰려온다. 하필 오늘따라 퇴근이 늦었다. 밤에 일정이 있어서 열 시가 넘어서 돌아왔다.


K도 우리 집으로 왔다. 수도관이 얼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했고, 자녀 양육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꼭 자녀 양육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지만) 물을 잃은 K의 아내와 자녀들은 K의 처가에 갔다. K는 집에서 혼자 잔다고 했다. 집에 가기 전에 우리 집에서 간단하게나마 씻기로 했다. 그 덕분인지(?) 집이 왠지 모르게 정갈하고 평화로웠다. 물론 평소에도 그렇긴 하지만, 남편인 나만 느끼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썼네’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게 뭔데? 어딘데?’라고 물으면 딱 집어서 대답하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분위기다. 세상의 모든 분주함과 복잡함이 잠드는 곳인 듯한 평화로운 분위기. 밝을 때의 치열함을 모르는 듯한 한가로운 분위기.


연출(혹은 연기)자는 아내다. 리얼 다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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