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은 만남

20.02.05(수)

by 어깨아빠

은율이네가 울산에서 놀러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집에 오는 게 목적은 아니었고 내일부터 참석하는 수련회에 가기 위해 하루 전에 와서 자는 거였다.


"아빠. 은율이 언제 와여? 어디쯤 왔대여?"

"아빠아. 은뉴리 뎡아 언데 와여엉?"


분명히


"점심때쯤 온대. 작은 바늘이 1에 가고 긴 바늘이 12에 가면"


이라고 얘기해줬지만 소용없었다. 수시로 물어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은율이네가 도착했고 일단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대성씨(은율이와 가을이 아빠, 승에 자매 남편)는 일 때문에 전화받으랴 가을이 먹이랴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거 같았다. 나도 시윤이를 옆에 앉혀 놓고 전담하기는 했지만 시윤이는 가을이(아직 두 돌 안 됨)에 비하면 훨씬 손이 덜 갔다. 대성씨가 안쓰럽긴 했지만 나도 3개월 정도 뒤에는 비슷한, 아니 더 심한(?) 처지가 될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파묻고 칼국수를 열심히 먹었다.


아이들은 깊었던 그리움만큼이나 금세 잘 어울렸다. 사실 이제 오랜만에 봤다고 어색할 정도의 사이는 아닌 듯하다. 아직 어리기도 하고. 밥 먹고 나서 카페에 갔다. 애 넷을 데리고도 아주 자유로울 수 있는, 평소에 자주 가는 곳으로 갔다. 별관 개념의 작은 공간이 따로 있고 보통 낮에는 사람이 없어서 애들이 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시끄럽게 해도 괜찮았다. 애들을 통제할 일이 없어지면 어른도 편해지고.


어른 넷 모두 엉덩이를 붙이고 여유롭게 커피도 마시고, 빵도 먹으며 수다를 떠는데 대성씨가 가장 먼저 엉덩이를 뗐다. 가을이가 아직 말은 못 하고 "잉잉" 하는 소리로 모든 걸 표현하지만 내가 봐도 나가자는 뜻 같았다. 대성씨는 본디 이런 아이들의 요구를 묵살하는 성품이 아니다. 잠시 후에는 나머지 애들도 답답하다며 나가겠다고 했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깊은 영하의 날씨였지만 막기에는 애들의 마음은 이미 바깥으로 나간 뒤였다. 최대한 옷매무새를 단단히 여미고 내보냈다. 밖에는 대성씨가 있었다.


조금 있다가 대성씨가 가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너무 추운 모양이었다. 힘도 들었을 테고. 가을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바로 낑낑거리며 아빠 손을 잡아끌었다.


"가을아. 삼촌이랑 나갈까?"


2개월 전에 만나서 나름 친분을 쌓고 얼굴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주차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날 피하며 아빠에게로 도망갔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지 않을까 싶었다. 여전히 날 경계하는 눈빛이었으니까. 안심하고 있는데 가을이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진짜? 삼촌이랑 나갈까?"


가을이는 순순히 나를 따랐다.


'가을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은율이와 소윤이, 시윤이는 자기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었다. 아직 거동이 완전치 못하고 부상 위험이 많은 가을이 옆에서 바다의 등대처럼 아이들을 통솔했다. 뭐 하다 보면 애들이랑 있는 것도 나름 재밌고 아예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더 즐겁기도 하지만, 춥긴 추웠다.


자리를 정리하고 집으로 갈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밖에서 개고ㅅ...아니, 놀았다.


집에 와서는 특별히 한 게 없었다. 아이들은 열심히 놀았고 어른들은 가만히 앉아서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눴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낮잠을 자지 않았고 그로 인한 피로로 마음이 좀 작아졌을 때는 장난감을 사이에 두고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길지 않았다. 갈등이라기보다는 시윤이의 일방적인 고집인 경우가 더 많았다. 같이 어울리기 어려운, 어울리기는커녕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가을이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놀았다. 부모들의 가르침(동생도 챙기면서 놀아야 한다. 아무리 어려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을이 스스로도 재밌어 보였다. 승아 자매와 대성씨는


"와. 가을이 진짜 잘 논다. 한 번도 안 우네"


이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평소에는 이런 애가 아닌데 쟤가 참 희한하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내 머릿속에 가을이는 '울음을 잊은 아기'인데. 애들이 이렇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와. 얘 너무 순하다. 이런 애면 몇 명이라도 낳아서 키우겠다"


이런 소리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군인이랑 비슷한 거다. 속된 말로 아무리 꿀 빨고 땡보여도 자기가 근무하는 곳은 실미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육아인도 다 자기 애가 제일 거칠고 힘든 거다. 가을이처럼 때와 장소에 따라 처신을 달리하는 연기자 아기도 많고.


좀 전에 만나서 밥 먹은 거 같은데 금방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양쪽 부모님들이 가득 채워주신 냉장고가 아내와 나의 믿을 구석이었다. 밑반찬은 물론이고 잡채와 불고기도 있었다.


어른들은 바닥에 상을 펴고 앉았고 가을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식탁에 따로 앉혔다. 완전한 자율성을 부여한 식사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 하나 자리를 이탈하거나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식사를 마쳤다. 아빠 옆에서 보조를 받은 가을이조차 엄청 열심히, 잘 먹었다. 아, 이 뿌듯함. 이것은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수도 없이 많은 안 먹느니만 못한 인고의 식사 시간을 견딘 값진, 달콤한 결과였다. (평소에도 이런 일은 많지만 다른 가정과 연합하면 뭔가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네?)


아내는 아이들의 조기 취침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었다. 모두 그런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내가 보기에 대성씨와 승아 자매는 우리(아내와 나)보다는 자유로웠다. 자면 자고 아니면 말고의 느낌이랄까. 오늘은 나도 오히려 약간 마음을 비웠다. 낮잠을 안 자긴 했지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손님이 와서 함께 자는 날에는 늘 오래 걸렸다. 신나고 들떠서 그런가. 아무튼 그랬다.


"여보. 마음을 비워. 괜히 기대하다가 또 열받는다"

"그래도. 빨리 재우면 좋잖아"


아이들은 너무 재밌고 화목하게 잘 놀았다. 들어가서 자는 게 마땅한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흥을 끊어야 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잘 놀았다. 몇 번이나 추가시간을 준 뒤에 겨우겨우 노는 시간을 끝내고 취침 준비에 들어갔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어른은 모두 재우러 들어갔다. 은율이네는 은율이는 엄마를 원했고 가을이는 아빠를 원해서 둘 다 들어갔다. 역시 내 예상대로 다들 금방 나오지는 못했다. 가장 먼저 승아 자매가 나왔다. 은율이 안녕. 그다음은 꽤 한참 걸렸다. 소윤이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아내가 나왔다. 씩씩거리면서


"하아. 왜 안 자"

아마 가을이가 많이 울어서 쉽게 잠들긴 힘들었을 거다. 그건 아내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안다고 감정이 다스려지는 건 아니니까. 이럴 때는 그냥 가만히 아내의 감정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면 된다. 괜히 말을 보탰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대성씨가 나왔다.


"소윤이는 자요?"

"아니요. 아직 안 자는 거 같아요. 계속 울고 있어요"


우리 딸은 남편을 잃었나 밤마다 왜 그렇게 우는 건지. 아내와 승아 자매는 자연드림에 가서 장도 보고 야식으로 먹을 치킨도 사기 위해서 나갔다. 대성씨와 거실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데 소윤이 울음소리가 꽤 오래 들렸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더니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소윤아. 왜 그렇게 울어"


달래줘야 할 때인 거 같아서 안아주고 토닥여줬다. 울음이 좀 진정됐다. 그 뒤로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일부터 2박 3일 동안 수련회(매우 빡빡한 일정의)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새벽 1시에 자리를 파했다. 지난 12월에는 새벽 3시 넘어서까지 이야기를 나눴던 걸 생각하면 굉장히 빠른 종료였다. 음식도 아쉬운 듯 먹어야 다음이 기대되는 것처럼 만남도 그러하리라고 위로하며 자리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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