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월)
집 재계약 때문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도저히 내가 갈 수가 없어서 아내가 대신 갔다. 애 셋을 데리고 관리사무소에 들러서 여러 서류도 챙기고 멀리까지 가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었다. 다행히 가야 하는 곳이 처가에서 가까워서 일단 파주에 간다고 했다.
오전에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서윤이만 데리고 나왔다고 했다. 사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청 기다렸다. 토요일에는
“아빠. 주말은 천천히 갔으면 좋겠는데 월요일은 빨리 됐으면 좋겠어여”
“왜?”
“주말에는 아빠랑 있으니까 좋은데 월요일에는 파주 할머니 집에 가잖아여”
라고 얘기했다. 주일에는
“아빠. 벌써 주말이 끝나서 아쉽기는 한데 그래도 좋아여. 내일 월요일이니까”
라고 얘기했다. 몇 번이나 얘기했다. 파주에 가는걸.
아내와 아이들은 나랑 비슷하게 집에 돌아왔다. 장모님이 싸 주신 반찬으로 부지런히 저녁을 차려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잔뜩 신나서 또 하루의 일들을 기분 좋게 쏟아내길래 잘 놀기만 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아내와 장모님의 통화를 들으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당신이 오실 수 없으니 네가 자주 놀러 오라는 장모님의 말에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집에 오는 게 너무 힘들어요. 올 때마다 너무 징징대니까”
애들을 모두 재우고 나온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은 커피 마셨어? 파운(파주의 단골 카페) 가서?”
“아니”
“아, 그랬어? 웬일로?”
“그냥”
처가에서 걸어가도 되는 거리에 있는, 아내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카페였다. 파주에 갔는데 거기를 안 들렀다고 하는 게 의아했다. ‘그냥 시간이 없어서 그랬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다른 날(커피를 마시지 못한)에 비해 커피 욕구도 별로 없어 보였다.
아내와 소파에 앉아 애들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봤다. 어제 찍어 놓고 못 본 사진부터 차례대로.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뭔가 이상한 사진 하나가 지나갔다. 희한한 건 분명 나만 본 게 아니었을 텐데 아내는 모르는 척 계속 사진을 넘겼다.
“여보. 방금 그건 뭐야?”
“어?”
“조금 전에. 그 사진 뭐야?”
아내는 그렇게 말하는데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내가 다시 앞으로 사진을 넘겼다. 먹음직스러운 크로플 한 개, 커피 한 잔.
“여보. ‘오늘(카페이름)’ 갔었어?”
“어”
“뭐야. 커피 안 마셨다며”
“아, 그냥. 창피해서 말 안 했어”
“뭐가?”
“그냥. 뭔가 창피해서”
아내는 서윤이를 데리고 일을 처리한 뒤 차로 20여 분을 달려서 카페에 갔다. 크로플과 커피를 샀지만, 카페에는 머물 수 없기 때문에 바로 차로 돌아왔다. 아내는 차에 앉아 크로플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아내가 카페에 다녀온 건 소윤이와 시윤이도 모르고, 장모님도 모르신다고 했다.
아마 이 과정 어딘가에서 아내는 갑자기 자기 객관화가 되었나 보다. 추측하기로는 서윤이를 카시트에 눕혀 놓고 운전석에 앉아 빵과 커피를 먹을 때가 아닐까 싶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조합이라 할 수 있는 유럽풍 ‘크로플’을 더할 나위 없이 한국적으로, 남대문 시장에서 쉴 틈 없이 물건 배달을 하다가 트럭에 앉아 끼니를 해결하는 어느 고단한 노동자가 먹는 단팥빵처럼 먹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나 보다.
그걸 말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그렇게 허술하게 사진을 남긴 것도 그렇고, 남긴 사진을 아무 생각 없이 노출시킨 것도 그렇고. 서른이 넘어도 귀엽네? 어쩐지. 커피 안 마시고 싶냐고 물어봤을 때 뜨뜨미지근하더라니.
아내의 ‘크로플과 커피 취식 은폐 시도 사건’이 들통나는 동안 서윤이가 한 번 깨서 울었다. 딱 5초 울었다. 그러더니 조용했다. 아내와 나는 처음에는 아예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잘 거라는 생각이. 5초가 10초가 되고, 10초가 1분이 되고, 1분이 3분이 되자 아내와 나의 마음에 ‘설마꽃’이 싹을 틔웠다.
“에이, 설마”
“그러게. 설마”
맙소사. 서윤이는 아내와 내가 자러 들어갈 때까지 한 번도 안 깼다. 시간으로 따지면 4시간 가까이. 몇 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보. 이게 뭔 일이야”
“그러니까. 쟤 왜 그러지”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경험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그래도 너무 오랜만이라 신기하고 들떴다. 갑자기 사라졌으니, 다시 나타날 때도 예고 없이 갑자기 나타날 거다. 서윤이의 통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