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을 위해

21.02.08(월)

by 어깨아빠

아내가 보내주는 아이들 사진이, 일하는 시간에 누리는 큰 즐거움이다. 물론 요즘은 서윤이가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도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지만 내 머릿속에는 앞뒤 모습이 그려지고, 그걸 상상하면서 혼자 웃는다. 물론 속으로. 그에 비해 서윤이는 그냥 사진만 봐도, 사진을 보는 순간 그냥 막 아우 그냥 막. 첫째, 둘째가 아들인데 막내가 딸인 사람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 막내딸의 진가를 더 확실하게 누릴 것 같아서.


서윤이는 이제 기댈 곳이 없어도 두 발로 잘 선다. 기는 속도는 엄청 빨라졌다. 빨대컵도 능숙하게 사용하고, 먹어 본 것도 많아졌다. 오늘은 찐 감자도 먹었다. 소파에도 혼자 올라가는 건 물론이고 내려올 때는 뒤로 돌아서 발부터 내려올 줄도 안다. 손에 쥐고 있는 걸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빼앗기면 카랑카랑하게 운다.


오늘은 서윤이의 새로운 모습을 또 발견했다. 아내가 소윤이와 시윤이를 업어줬는데 잘 놀던 서윤이가 그걸 보더니 갑자기 울면서 아내한테 매달렸다. 누가 봐도 질투였다. 서윤이를 잠깐 안아주고 다시 내려놨더니 또 멀쩡했다. 시험 삼아 또 해봤다. 아내가 다시 소윤이와 시윤이를 안아주자 서윤이는 또 하던 걸 내팽개치고 울며 아내에게 기어 왔다. 몸이 크고 행동이 달라지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렇게 생각이 자라는 건 더 신기하다.

퇴근하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연말정산 환급됐던데? 엄청 조금. 낸 게 없어서 안 될 줄 알았더니”

“그래? 그럼 오늘 맛있는 거 먹어야 되나”

“오늘? 저녁 준비하는 거 아니야?”

“하고 있지”

“그런데 무슨 맛있는 거?”

“그냥 맛있는 거. 오는 길에 사 와”

“지금 사 가라고? 뭐? 빵?”

“그래. 빵 사 와”

“뭐야. 왜 그렇게 별로 안 좋아하는 것처럼 얘기해?”

“커피도 사 와”

“커피?”

“응. 따뜻한 라떼”

“어디서?”

“임종호”


아내는 민망했는지 굉장히 무심한 듯 원하는 걸 주문했다.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고 빵집에 가서 빵도 샀다. 아내가 먹을 빵만 골랐다가 애들이 먹을 빵도 하나 골랐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요즘 라우겐 스콘에 맛을 들였다. 아내가 나를 전도했고, 난 애들을 전도했다. 덕분에 나는 못 먹고 애들만 먹을 때가 많아졌다. 내가 먹을 스콘도 아닌데 사면서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소윤이와 시윤이느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듯, 매일 몸으로 놀아달라고 요청한다. 최근에는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거의 응해주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오늘은 기꺼이 몸을 일으켰다. 그냥 아빠한테 한 번 안기고, 매달리겠다는 건데 체력이 없을 때는 그게 뭐가 그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오늘은 최선을 다해 몸을 썼다. 서윤이하고는 계속 눈을 맞추며 웃음을 교환했다. 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서윤이는 아직 아빠한테 매달린 언니와 오빠를 보고서는 질투를 하지 않는다.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본다.


저녁을 먹으며 서윤이 이유식도 같이 먹였다.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잘 먹는다는 건 그만큼 속도도 빠르다는 거고, 생각보다 내 밥을 뜰 여유가 없다. 꽤 허겁지겁 먹어야 한다. 원래 밥 먹는 속도가 빠른 편인데도 그것보다 더 채찍질을 당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싹 비우니 좋다.


아내는 오늘도 저녁을 먹고 나니, 방전 직전이었다. 그때부터 애들 재울 때까지는 거의 정신력으로 버티는 느낌이다. 그래도 오늘은 커피와 빵이 준비되어 있으니 금방 충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애들을 재우러 들어가고, 난 산책을 겸한 운동을 하러 나왔다. 1시간 정도 걷고 왔을 때 아내는 역시나 행복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커피와 빵을 먹고 있었다.


“여보. 커피 맛있다. 진짜 맛있다. 임종호가 맛있긴 하네”


맛있는 커피 한 모금, 빵 한 조각(실제로 한 봉지, 시적 허용이라고 해두자)에 하루의 고단함을 날릴 줄 아는 아내가 소박하다고 생각했다. 저녁 먹은 뒤에는 바닥을 기던 아내가, 다시 살아났다. 사실 거의 매일 이런 수순이다. 옛날에 오락실에서 횡스크롤 액션 게임하면 꼭 중간에 ‘에너지’를 채워주는 음식이나 약물이 나오곤 했다. 아내에게 커피와 빵이 그런 역할이다. 빨갛게 찬 에너지 바를 다시 노란색으로 돌려놓는 귀한 아이템이다.


재우고 나오면 시간이 얼마 안 남긴 하지만, 아내는 회복된 체력을 바탕으로 그 시간을 밀도 있게 활용해서 놀기도 하고 쉬기도 하고 몸과 마음과 머리를 새로 채우기도 하고, 집안일을 하기도 한다.


퇴근길에 커피와 빵을 사다 나르는 게 가끔은 굉장히 번거롭고 성가실 때도 있지만, 아내의 소중한 마지막 시간을 위해 앞으로도 열심히 나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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