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3(토)
명절 연휴라기보다는 긴 주말 느낌으로 보내고 있다. TV도 없어서 설 특집 프로그램 같은 것도 못 보고, 가족들도 만나지 못하니 정말 명절 같지 않다. 이틀이나 쉬었는데 이제 토요일이라는 사실과 이틀이 언제 그렇기 지나갔나 싶은, 감사와 아쉬움이 공존하는 날이었다.
아침 주고 간식 주고 놀아 주고 닦아 주고 점심 주고 간식 주고 놀아 주고. 반나절 동안 부각될 만한 일은 없었다. 육아인이라면 해야 하는 기본의 일을 하며 보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숨이 찰 때가 있지만, 그래도 좋다. 회사일보다는 집안일이 낫고, 업무에 치이는 것보다는 애들한테 치이는 게 낫다. 나는 그렇다. 내가 별종인가 싶을 정도로 ‘차라리 회사가 낫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주변에 제법 있다.
아내에게 오늘의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은 이불 빨래였다. 시윤이가 오줌을 싼 이불을 빨아야 했다. 사실 엄청 오래된 이불이었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 일이었다. 임시로 베란다에 내놓은 게 지금까지 그대로 방치됐다. 오늘은 그걸 꼭 빨자고 했다. 집에 있는 세탁기로는 안 되니 집 앞 빨래방에 가서 빨고 말리기로 했다.
점심 먹고 이불을 챙겨서 집 앞 빨래방에 갔다. 어차피 빨래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나간 김에 산책도 하기로 했다. 혼자 밤에 운동할 때 가 봤던 집 근처 작은 동산(?)에 가자고 했다. 애들이랑 바람 쐬며 걷기에 딱 좋아 보였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기대가 너무 커서 약간 부담스러웠다.
“아빠가 가자고 하는 곳이 어딜까?”
“아빠아. 노픙 산이에여어?”
“아빠. 거기 가면 야호 소리도 지를 수 있어여?”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작은 동산이라고 설명해 줬지만 동산이 뭐냐는 질문을 되받았다. 산책하는 길인데 약간 산 같은 느낌이라고 얘기해 줬다.
작은 동산이어도 계단과 오르막이 많은 길이니 서윤이는 내가 아기띠로 안았다. 사람이 거의 없었다. 드물게 마주칠 때를 빼고는 마스크를 벗고 걸었다. 마스크를 벗고 나무와 흙냄새가 섞인 공기를 들이 마시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오랜만에 밟는 흙길이 좋았는지 열심히 걷고 뛰었다.
이렇게 써 놓으니 마치 엄청난 등산을 한 것 같지만, 고작 15-20분 정도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된 등산을 하기 위한 몸풀기 정도랄까. 소윤이와 시윤이도 너무 금방 끝난 등산이 아쉬웠는지, 다음에는 더 높고 오래 걸리는 산을 가자고 얘기했다. 다만 다음에 등산을 하려면 등산용 캐리어(?, 아이를 등에 업을 수 있는, 허리에 무리가 덜 간다는)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허리가 정상은 아닌 터라, 동산 등산에도 허리에 조금씩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다시 빨래방으로 가서 이불을 건조기에 옮겼다. 건조되는 동안 동네 마트에 들렀다가 놀이터에 가서 그네를 조금 탔다. 물론 애들이. 서윤이는 놀이터에 가서 아내에게 넘겼다. 허리가 많이 뻐근했다. 슬펐다. 내 몸이 이렇게 낡았다니. 뻐근할 뿐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허리를 펴고 힘을 내어 그네를 밀어줬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잠깐 그네를 타면서도 무척 즐거워하고 많이 웃었다. 아내도 서윤이를 안고 아주 잠깐 그네를 탔다. 참 행복한 한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소윤이랑 시윤이가 내 앞에서 툭닥거리며 노는데 ‘얘네가 언제까지 이렇게 내 앞에 있는 게 아닐 텐데’하는 생각을 또 했다. 과연 그 그리움을 내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불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은 불고기였다. 아내가 만들려고 했지만, 오늘도 서윤이가 아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아내가 불러주는 레시피대로 불고기를 만들었다. 연휴가 길수록 내 요리 실력도 발전하는 느낌이다. 요즘 애들이랑 밥 먹을 때마다 놀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싶은 양이면 여지없이 약간 부족하다. 오늘 불고기도, 나의 위장 건강에 딱 좋을 정도의 양이었다.
저녁 먹고 나서는 팝콘을 만들어줬다. 원래 어제 해주기로 약속했는데(어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약속은 했었다) 못 해줘서 오늘은 해주고 싶었다. 저녁 먹고 나면, 한시라도 빨리 아이들을 재우려는 게 아내와 나의 본능이지만 오늘은 예외를 뒀다. 명절 연휴니까. 팝콘은 아주 맛있었다. 아내와 나는 집에서 뭘 만들어 먹일 때마다,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게 밖에서 파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건강하고, 귀한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약간의 자화자찬을 가미해서.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도 점점 그 가치를 인정하고 깨닫는 것 같아 뿌듯하다. 자기 전에 책까지 재미있게, 웃음이 빵빵 터지도록 읽어주는 것으로 오늘의 소임을 마쳤다.
애들과 인사를 하고 방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소파에 앉아, 아내와 내가 자주 가는 카페의 영업시간을 알아봤다. 다행히 아직 문 닫기 전인 카페가 한 곳 있었다. 바로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아내도 나도, 아침 먹고 집에서 내려 마신 커피가 전부였기 때문에 아내의 커피 욕구가 매우 강렬할 거라고 생각했다. 커피를 사 가지고 돌아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아, 나 잠깐 운동 나왔어”
“아, 그래? 언제 들어와?”
“이제 곧 가야지”
“그래 알았어”
아내의 마지막 말에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게 영화를 볼까 얘기해 놓고 운동을 나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커피라도 사러 갈까(혹은 사 달라고 할까)했는데 그럴 수 없게 돼서 그런 건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미세하게 실망하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1분 만에 집에 들어갔다.
“헐. 뭐야?”
“커피 사러 갔지”
“대박. 운동하러 갔다가?”
“운동? 안 했지”
“뭐야. 장난친 거야?”
“그렇지. 자”
“여보. 진짜 대박이다. 진짜 대박. 와. 진짜 완전 짱이야”
아내의 반응이 격렬했다. 안 그래도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사러 갈까 하다가 너무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포기했다가 그래도 사러 갈까 하다가를 반복하며 번뇌하는 중이었다고 했다. 아내는 한참 동안 나의 ‘센스’를 극찬하며 엄지를 올렸다. 커피와 빵 하나에 남편을 세우는 아내를 만나 얼마나 다행인지.
어제 이루지 못한 영화의 밤을, 오늘 대신했다. 서윤이는 중간에 한 번 깼지만 다행히 아내는 무사히 살아 나왔다. 영화도 끝까지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