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13(토)
소윤이가 성경 필사를 마쳤다. 물론 전체는 아니고 ‘요나서’ 한 권. 소윤이의 수고를 축하하고 앞으로의 수고 또한 격려하는 의미로 선물을 하나 사 주기로 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원하는 선물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선뜻 고르지 못했다. 이럴 걸 예상하고 아내와 어느 정도 후보를 정해 놨다.
“소윤아. 사실 엄마랑 아빠가 어느 정도 정하긴 했는데 어떤지 들어 봐. 우선 한 가지 후보는 책이고 나머지는 블록이야. 어때?”
“아무거나여?”
“음, 완전히 아무거나는 아니고 책은 소윤이가 골라 오면 엄마, 아빠가 보고 괜찮으면 사 거나 엄마, 아빠가 골라주는 것 중에 소윤이가 마음에 드는 걸 고르거나. 블록은 가서 적당한 걸로”
“그래여”
사실 소윤이는 엄청 기대가 컸다. 필사를 마치면 선물을 하나 사 주겠다는 말에, 필사가 끝날 무렵이 되자 마치 생일을 기다릴 때처럼 계속 얘기했다.
아침을 먹고 그나마 사람이 덜 붐빌 듯한 집 근처 쇼핑몰로 갔다. 가기 전에 시윤이에게도 잘 설명을 해줬다. 꽤 까다로운 설명이었지만 최대한 시윤이가 서운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이건 누나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는 걸 알려줬다.
“시윤아. 오늘 누나 필사 선물 사러 가는 거야. 알지? 시윤이도 지금 한글이랑 숫자 열심히 배우고 있잖아. 그럼 성경도 읽고 필사도 할 수 있어. 시윤이도 그때 열심히 해. 알았지?”
시윤이는 생각보다 서운해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매일 아침마다 누나가 쓰디쓴 인내의 시간을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직 한글을 모르기 때문이긴 하지만 자기는 편히 탱자탱자 놀 때, 누나는 아픈 손을 털어가며 꾸역꾸역 정해진 분량을 채워 나가는 걸 봤으니 쉽게 서운해하지도 못한 건가 싶다.
아침 먹고 잠깐 바람 쐴 겸 가볍게 다녀올 생각이었다. 서윤이는 차에서 잠들었다. 덕분에 바로 유모차에 태웠고, 선물을 살펴 보기에 가장 적합한 상황이 되었다. 우선 서점부터 갔다. 책 고르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너무 방대하다 보니 어디 가서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어른도 막막하다. 아내와 내가 미리 찾아 놓은 책 대여섯 권을 찾아서 나랑 아내가 먼저 읽어보고 괜찮은 건 소윤이에게도 읽어보라고 했다.
시윤이가 걸렸다. 아내와 나도 책 고르는데 집중하고 누나는 자기 힘으로 책을 읽느라 시윤이만 할 게 없었다. 아직 까막눈인 시윤이는 누가 읽어주지 않으면 좀처럼 흥미를 일으키기 힘든 시간이긴 했다.
“여보. 소윤이랑 책 골라. 난 시윤이랑 다른 데 가 있을 게”
책은 대충 골라 놨으니 아내에게 맡기고 시윤이를 데리고 나왔다. 또 다른 선물 후보인 블록을 파는 층으로 갔다. 사실 거기서도 시윤이가 엄청 신나게 막 흥분해서 돌아다닌 건 아니었다. 원래 잘 그러지도 않는 데다가 장난감을 막 사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아빠랑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슬렁슬렁 걷는 걸 즐거워했다.
소윤이랑 아내는 고르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사실 소윤이는 왠지 블록을 고를 거 같았다. 처음 블록과 책을 제시했을 때도 블록이 좋다고 했다가 일단 책도 보기는 하겠다고 얘기했다. 오랜 시간이 무색하게 왠지 블록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거 같았다. 시윤이랑 걷다 보니 힘들어서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아빠아. 누나랑 엄마는 언제 올까여어?”
“이제 다 골랐대. 우리가 엄마랑 누나 오는 데로 갈까?”
다시 아내와 소윤이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서윤이는 잠에서 깼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내는 바로 수유실로 갔고 난 밖에서 기다렸다. 한 2-3분 뒤에 온 건물을 쩌렁쩌렁 울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 애가 이렇게 우나’ 했겠지만, 난 알았다. 서윤이라는걸. 수유하기 전에 기저귀 갈려고 눕혀 놨더니 그렇게 목이 터져라 울었다. 거짓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곧 죽을 것처럼 빽빽 울었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조금 시끄러우니 다른 엄마, 아빠들과 아이들에게 미안할 뿐. 수유를 마치고 나온 서윤이는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다. 발갛게 상기된 볼과 함께 얼굴 가득 웃음을 채우고.
바로 블록을 보러 갔다. 소윤이는 사고 싶은 게 많았나 보다. 아니, 다 사고 싶었겠지. 한때 레고 애호가였던 나는 그 심정을 잘 안다. 가격 상한만 정하고 그 안에서는 뭐든 원하는 걸 고르라고 했다. 자꾸 본능적으로 ‘가성비’를 고려하게 되고, 그걸 소윤이에게도 은근히 권하려 하는 걸 꾹 참았다(이를테면, 가격 대비 블록 수가 너무 적은 것들). 소윤이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자그마한 박스 하나를 골랐다. 소윤이 생애 첫 레고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온 외출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냥 피곤했다. 애들이 전혀 힘들게 한 것도 없고 내내 웃으며 즐거운 분위기였음에도, 고단했다. 배도 너무 고팠다. 온 가족이 배가 고팠다. 돈까스와 찜닭을 최종 후보로 놓고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의견을 물었다.
“소윤아. 뭐 먹고 싶어?”
“찜닭”
“시윤아. 시윤이는? 찜닭 괜찮아?”
“네에. 좋아여어”
생각보다 양이 엄청 푸짐했다. 다음에 또 오게 된다면 더 작은 걸 시켜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들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다. 내가 제일 그랬다.
집에 돌아오니 잠이 쏟아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는데 거의 오후를 다 쓰고 돌아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바로 레고를 풀어서 식탁에 앉았고 난 소파와 바닥을 오가며 사투를 벌였다. 잠과의 사투를.
“여보. 차라리 방에 들어가서 좀 자고 나와”
“아니야. 괜찮아. 안 잘 거야”
“뭘 안 자. 그냥 들어가서 좀 자고 나와”
“아니야. 괜찮아”
그냥, 뭔가 들어가서 자는 게 내키지 않았다. 죄스럽기도 했고 금방 깨서 못 나올 거 같기도 했고. 결국 소파 앞에 누워서 잤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레고 만들며 떠드는 소리, 서윤이가 아내와 나의 주변에서 놀다가 징징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보통은 잠깐 자고 나면 피로가 싹 사라지는데 오늘은 한참 걸렸다.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목뒤를 누르고 있는 피곤을 떨쳐냈다.
자고 일어나니 소윤이가 레고를 완벽하게 조립해 놨다.
“아빠. 이거 봐여. 잘 만들었져?”
“소윤아. 니가 설명서 보고 한 거야?”
“네”
“오. 이제 이런 것도 잘 하는구나”
소윤이는 무척 재밌어했다. 시윤이하고도 갈등이 없었다. 소윤이도 적당히 시윤이를 배려했고, 시윤이도 함부로 선을 넘지 않았다.
저녁에는 온라인 모임이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도 함께 참여하는 모임이었다. 소윤이는 좋아했다. 그저 일찍 자지 않는 것만으로도. 시윤이는 조금 다르다. 시윤이는 졸리면 자고 싶어 한다. 소윤이는 졸려도 어떻게든 안 자고 싶어 하고. 거의 2시간에 가까운 모임을 무사히 마쳤다. 서윤이가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니었지만, 자꾸 아내한테만 안겨 있으려고 해서 아내가 고생했다.
아, 아내는 어제보다 몸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개선의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다. 주말이고 남편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몸과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피곤을 물리치지 않았을까 예상해 본다. 덕분에 애들 재우고 영화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