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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Feb 13. 2021

이반 일리치의 죽음

[영화로 풀어가는 죽음학 이야기 2] /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와 통찰을 끊임없이 찾으려 했던 가장 위대한 작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톨스토이를 꼽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살던 시대에는 죽음학이라는 학문이 없었겠지만 그는 가히 죽음학의 대가라 불려도 좋을 만큼 죽음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수많은 작품 속에서 설파하고 있다. 


오늘은 그의 단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온 문장들을 통해 죽음학의 메시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판사로서 잘 나가던 이반 일리치라는 사람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결국은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도 죽음은 다시 살 기회를 주지 않는다."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려는 이유는 삶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죽음을 앞두고 우리는 수많은 후회를 하겠지만, 죽음은 결코 살 기회를 다시 주지 않는다.  

"비록 친한 동료가 죽었지만 막상 사망 소식을 접하자 사람들은 으레 그렇듯이 자기가 아니라 그가 죽은 것에 대해 안도하는 기분이었다."

'다행'이나 '안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간혹 타인의 죽음에 무감하다. 죽음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누구에게 닥칠지 모른다.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모든 사람에게 닥친다는 것이다.


"그가 법정에서 피고를 대하는 것과 똑같은 태도로 고명한 의사 또한 그를 대하고 있었다. 의사는 이반 일리치의 목숨에 관한 질문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신장하수증과 맹장염 중 어느 것인지 밝히는 문제에만 매달렸다." 

이반 일리치는 판사였다. 그는 재판관으로서 그 앞에 선 피고인들을 어떻게 여겼는가?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대했는가 아니면 그저 일거리만으로 여겼는가? 병에 걸린 이반 일리치를 대하는 의사는 환자를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병명으로 대한다. 병에 걸린 '사람'을 보지 않고 그저 '병'만 본다. 자신이 당해보니 자신의 잘못이 보였다. 이반 일리치는 그때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후회한다. 하지만 늦었다. 죽음은 다시 그에게 삶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는 죽어가는 게 아니라 조금 아플 뿐이라는 거짓말, 마음을 차분하게 먹고 치료를 받으면 좋을 결과를 얻게 될 거라는 거짓말, 이것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내 상태에 대해 당사자인 나에게 왜 사실대로 알려주지 않는가. 왜 보호자가 필요한가.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고 어떻게 삶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준비할지를 왜 당신들이 결정하는가. 나의 삶에 대해 결정할 기회를 왜 당신들 마음대로 빼앗아 가는가. 나아질 거라고 믿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는 게 좋을 거라는 것은 나에게 좋다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들이 편하자고 그러는 것인가. 왜 나에게는 물어보지 않는가.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산에 오르고 있었어. 근데 사실은 정확히 그만큼 내 발아래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왜 사는가. 무엇이 중요한가. '사회적인 관점'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한 '나의 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삶의 목적을 생각하게 한다.

"이어서 예전에는 도저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 즉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죽음을 목적에 두고서 그 수 많았던 삶의 순간들과 선택들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후회 없는 삶은 있을 수 없겠지만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게 한다. 


"그는 그들에게서 자기 자신..자신의 삶이 지향하던 모든 것을 보았고, 이 모든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삶과 죽음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기만이라는 걸 똑똑히 보았다."

우리가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 자신을 포함해서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삶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는 기회를 우리는 죽음을 통해 가질 수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이 난다.

"그는 숨을 한차례 들이마셨다. 절반쯤 마시다 숨을 멈추고 긴장을 푼 후 숨을 거두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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