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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첸 Nov 04. 2018

#03  밭을 떠난 농부  



  나무들은 흙빛 낙엽을 벗어 내리고 농부들은 가을에 해야 할 일들로 열심이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아름다운 밭과 사랑하는 동료들이 있는 농장으로 돌아왔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오래된 꿈을 실현하고 싶어 한걸음에 이곳으로 달려왔다. 충남 어귀에 있는 이 농장은 전적으로 농사만 짓는 일반 농장과 달랐다. 농사의 아름다움과 잊혀져가는 농(農)적 감수성을 교육으로 전달하는 농장이었다. 덕분에 틀에 박힌 네모진 일자 이랑만 고집하지 않고 와이파이 모양의 곡선 밭, 틀 두둑, 정원에 수십 종의 채소와 꽃, 허브, 과실수들을 키웠다. 이 농장에 온지 두 번째 해부터는 전담 디자이너가 되어 밭의 구획을 나누고 식물들을 배치했다. 식물마다 다른 궁합과 높낮이, 색깔, 질감, 재배시기, 활용도에 따라 심고 가꾸는 일은 행복하다 못해 경이로웠다. 소규모 꾸러미(CSA) 사업과 동시에 소비자들에게 보내는 매월 ‘농부가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반은 사무실에서 반은 밭에서 일하는 생활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았다.

  가족여행은 무슨, 고구마 캐야지. 금빛의 논에 고개를 축 내려뜨린 벼도 추수하라 아우성치고, 빠르게 돌아가는 농장 일에 금세 여행 이야기는 잊혀졌다. 가끔 그 후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었지만 한 계절 고개를 넘어 늦가을이 되어도 아빠가 변심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핸드폰 진동소리가 그날따라 요란했다.

  전화를 받고 얼마 후, 손에 들고 있던 낫이 무색해졌다. 그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전화기를 붙든 채 별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밭 한가운데 서있던 나는 여러 해 머물었던 이 마을의 풍경을 낯선 이처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한가득 배추를 품에 안고 수레에 나르는 농장 식구들, 파란 가을 하늘 그리고 해진 내 작업복 바지에 물든 흙물….

  오후 5시 정도가 되었을까, 나는 언제나 노을빛이 물든 밭에 있기를 좋아했다. 바람에 춤추는 노랗고 둔탁한 에메랄드빛의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을 보면 마음이 한결같이 차분해졌다.


  ‘아빠가 가면 나도 간다고 했었지….’


  나는 당장 내일 떠나는 사람처럼 시무룩해졌다가도 아빠가 가겠다는 결정이 믿기지 않아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목사가 교회를 그만두고, 고등학생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농부도 밭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막상 농장을 떠나려니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대로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거란 느낌에 휩싸였다. 집에 어서 와서 여행준비를 하자는 엄마에게 그래도 한해 농사 마무리는 하고 가야하지 않겠느냐며 시간을 벌었다.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여러 계절 동거동락하던 농장 식구들에게 소식을 전하기가 고민스러웠다.

  농장은 그동안 자리 잡은 토대를 딛고 규모를 확장하며 협동조합을 만들 계획으로 한창 바빴다. 함께하는 식구들도 늘어나니 이제 진짜 우리가 꿈꾸던 걸 마음껏 해보겠구나 한껏 부풀다가도 거기에 내가 없다는 게 몹시 불안했다. 일이 머리에 그려지면 가만있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그 과정을 전적으로 참여할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런데다가 내가 있든 없든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척척 추진되어가니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둔덕에 아직 다 지지 않은 메리골드는 나더러 가지 말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내년에 틔우려고 채집한 씨앗과 볏짚으로 덮어놓은 이랑과 사랑스러운 암탉들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붙잡는 것 같았다.

  과연 지금 이 시기에 농장을 떠나는 게 맞는 선택일지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순간처럼 다가왔다.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미래에 동요하는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19세 여동생은 학교를 자퇴하고,
53세 엄마는 교회를 그만두고,
55세 아빠는 밭을 맡기고,
26세 나는 가족과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성질부리는 큰 딸이 302일 간 기록합니다.

숨겨둔 장면은 여기에서
https://www.instagram.com/travel_of_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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