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편
방송 5회차에서 통편집을 당했다. 영숙(당시 34세, 리사이클 인형 사업)과 랜덤 데이트를 했는데 나머지 다섯 쌍의 랜덤 데이트 커플들은 모두 조금이나마 방송에 나왔지만 나는 한 장면도 안 나왔다.
물론 제작진의 입장에서 중요한 장면이 아니긴 했다. 나는 이미 정순으로 노선이 정해져 있었고, 영숙도 영호(당시 30세, 제약회사 마케팅)와 정식(당시 30세, 공기업) 중 고민 중이었다. 내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물론 편안하고 즐거운 대화였으며, 영숙이 얼마나 사려 깊고 좋은 사람인지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긴 했지만 둘의 대화에 이성으로서의 교감이 있진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 매력 없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가 좋았으면 상대방도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갔던 나는 솔로만 봐도, 같이 데이트를 한 여자는 표정이 썩었는데, 남자는 성공적이고 만족스런 데이트였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카메라는 객관적이다. 제한된 분량 시간에 시청자에게 최대한의 즐거움을 줘야 하기에, 여러 장면 중 가장 재미있는 장면을 뽑아서 넣어야 한다. 감동적이건, 슬프건, 로맨틱하건, 웃기건, 뭐라도 해야 한다. 가학 욕구라도 충족시켜줘야 한다. 그러니까 방송 분량이 많다는 건 그가 "재미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시청자들이 보기에, 그리고 그들에게 최고의 1시간을 선사해야 하는 제작진이 보기에. 그리고 그 심사 결과 내게 내려진 처분은 통편집이었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4기 남자 출연자들끼리 이태원에 있는 바에 놀러갔는데 클럽처럼 헌팅을 하는 분위기여서 자연스럽게 여자들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우리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여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나한테 관심을 갖는 여자는 없었다. 애초에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지를 않으니 말을 걸 수도 없었고, 대화를 할 수도 없었다.
다른 기수 출연자들과 만났을 때도 나는 늘 안중에 없었다. 방송 뒷이야기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고, 실물이 훨씬 낫다거나 그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별로인가?
이런 생각 다시는 안 할 줄 알았다. 솔로나라에서 나는 나 자신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잘 생기고 몸 좋은 남자가 아니다. 여심을 쥐고 흔드는 알파 메일도 아니고, 돈 많고 잘나가는 남자도 아니다. 하지만 나만이 줄 수 있는 가치들이 있다. 나는 남들보다 더 깊이,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이국적인 여행지나 고급스런 레스토랑 같은 건 잘 모르지만 느껴보지 않은 감정, 해보지 않은 생각들을 경험하게 해줄 수는 있다. 그건 내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남들 부러워할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것들로 승부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밖에 나오니 똑같았다. 주목과 존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 인스타 팔로워가 다른 출연자들보다 적어보일 때, 라이브 방송을 켰는데 아무도 댓글을 안 달아줄 때 부정적인 생각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도 다들 금방 떠난 거겠지. 그러니까 맨날 차이기나 하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커플이 못되고 빈손으로 나온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