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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Oct 26. 2018

울지 못하는 캔디가 돼버린 채

안녕, 낯선 내 마음

늘 생각해봤다.

죽음을 이기고 나면 무엇이 살아남을지, 바람이 몰아치고 잠잠해지면 고요가 찾아올 수 있을지. 기다려보고 또 기다려봤다. 기다림 후에 무엇이 올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일을 위해 오늘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게 됐다. 안주한 편함이 불완전한 평안을 흔들지 않도록 중심을 지키는 것이 내가 끝끝내 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을.


산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무언가를 견뎌내는 일이었다. 울면서 주저앉는 대신 우뚝 서서 다가오는 것들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 왜 그토록 나는,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요,'나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이런 식의 노래들을 따라 부르며 그 가사들을 가슴 깊이 새겼던 것일까.


캔디나 하니는 우는 대신에 힘차게 달리던 소녀들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 소녀들을 따라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그것이 하나의 미덕인 것처럼 여겨졌다. 운다는 것은 지극히 나약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고, 나에게 눈물은 패배자들의 산물에 불과했다. 극단적으로 우는 행위를 죄악과 동일시했다. 그런데 웃긴 건, 캔디에겐 늘 그녀를 도와주던 안소니와 테리우스가 있었고, 하니에게도 홍두깨 선생님이 있었다는 것. 진정 그 소녀들은 자신의 힘만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 심지어 하니는 부잣집 딸이었다는 것. 그런데도 마치 다른 소녀들에게는 그녀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달리고 또 달리고, 울지 않고 또 웃었던 소녀같은 인상을 주고 말았다.




울지 말라는 메시지들은 당시의 소녀들을 얼마만큼 강하게 만들었을까? 왜 내가 어린 시절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울어도 된다고, 우는 것은 창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대신 울지 말라고 해야만 했을까. 왜 그것이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조차 받지 못 할 나쁜 행위인 것처럼 노래를 불러주었을까. 울면서 어른들을 성가시게 만드는 아이들이 얼마나 나쁜 아이들인지 무의식에 저장돼 다루기 쉬운 아이들이 되기를 바랐던 것일까.


나는 가끔, 아니 아주 자주 울지 못하는 어른들을 본다. 자신의 아이를 잃었는데도 울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울지 않는 그 사람을 걱정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 하듯이 객관화하여 이야기하곤 했고, 울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울음 앞에서 자신이 무너져 내릴까봐, 간신히 지금을 견디고 있는데 한번 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픔의 둑이 터져버릴까봐 구멍 하나를 손가락으로 간신히 막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울지 못하는 어른들은 어렸을 때는 잘 울었는데, 어른이 돼서 갑자기 울지 않게 된 것일까? 나는 어렸을 때 남들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고, 남들에게 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울지 않음으로 나의 강함을 증명하려고 했다. 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심지어 나는 강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 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내겐 '훌륭한 사람 = 강한 사람'이라는 등식이 그때부터 생겼다. 그런 등식이 갑자기 어른이 됐다고 쉽사리 깨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른인 내게 여전히 운다는 행위는 자신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행위였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른이 돼서도 울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마 어렸을 때도 자신의 눈물과 울음을 누군가에게 공감받지 못했을 확률이 크다. 자신의 슬픔을 모른 척하는 것이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다보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눈물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슬픔을 느끼게 하는 감정 외의 다른 감정들에게까지 둔감해져버린 것은 아닌지.


무표정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의 얼굴 뒤로 얼마나 무수히 많은 슬픔들이 감춰져 있을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오히려 인상을 쓰거나 화를 내는 사람들은 자신의 웃음이나 기쁨에 대한 감각 역시 깨워내고 여러 가지의 자신의 모습을 만족시키고 있을 수도 있다.




며칠 전에 독감예방주사를 맞으러 갔다. 더 추워지기 전에 온 가족이 모두 접종을 해야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홉 살 짜리 큰 아들에게 의사 선생님이 그랬다.


"네가 의젓하게 맞아야 동생도 울지 않고 잘 맞을 수 있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들에게 울어도 된다고 말했다. 접종을 끝낸 큰 아들이 울고 싶지만 형으로서 울지 않고 참는 것 같아서 꼭 안아주면서 아프면 크게 울라고 했다.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다 큰 어른으로 살게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어른의 모습이라고 가르쳐주고 싶지 않다. 다 커서도 울 수 있다고, 다 큰 어른도 울어도 되는 거라고 말했더니 아홉 살짜리 아들은 놀라면서 물었다.


"어른도 울어? 어른도 울어도 되는 거야?

"그럼, 어른도 당연히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울어도 되는 거야."


우리의 감정 중 우리가 잃어도 좋은 것들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느끼는 감정조차도 신이 우리에게 준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결코 쓸모없어서가 아님을. 우리는 울면서 태어났다. 그것은 태초부터 자연스러운 우리들의 모습이었고, 어른이 된 지금도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울지 않아도 좋은 상처같은 건 없어요.
심지어 뜻 모를 눈물까지도 허락해 주세요.




https://brunch.co.kr/@ultraromy/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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