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0. 인트로
#. 거꾸로 가는 남자들: 영화의 주인공인 다미앵은 남성 우월주의자이다. 언제나 여성을 폄하하며 살아온 '부드러운 마초이즘'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는 남성의 행동과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 저자는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구조는 거만한 가부장적 세계에 기반한다고 말한다. 페미니즘의 진영 외부에 존재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남성성의 대안을 제시하는 책.
1. 아직도 '여류작가'?
매월마다 정기적으로 참가하는 독서모임이 있다. 빈 종이를 뜻하는 ‘공지’를 이름으로 하는 그 곳에선 책과 영화를 같이 감상하고 감상평을 공유한다. 모임원 각자의 나이와 직업, 사회적 경험이 너무나 다르기에,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얻곤 한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접하지 않을 장르나 주제의 작품도 다양하게 읽게 되는데, 어느 모임원께서 갈수록 격화되고 있는 남녀 간 젠더 갈등을 이야기해보자는 의견을 주셨다. 그렇게 10월 모임에서 이야기할 작품으로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책), 거꾸로 가는 남자들(영화)를 선정했다.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을 상반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두 작품을 접하니, 문득 8월 감상 작품인 '소설 보다: 여름'의 소개글을 작성하던 때가 떠올랐다. 여성작가들의 신선한 단편소설을 모은 소설집이었는데, ‘최근 주목받는 여류작가의 소설을 읽어 봅시다.’라는 내용으로 작성하고 공유까지 끝냈다. 그리고 여자 친구에게 글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요청하니, ‘여류작가’라는 단어는 요새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확한 이유를 알기 위해 부리나케 ‘류’라는 한자어를 검색했고, 그 뜻은 ‘질이나 속성이 비슷한 것들의 부류’였다.
2. 나와 타인을 분류하기
최근 이직한 회사에서 동료와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항상 출근시간에 약 5분 정도 늦는 부서원에 대한 이야기 나왔다. 그분에게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저는 근무시간을 지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최근에 다리를 다쳐 출근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걸 알고 머쓱했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분의 업무방식이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모습이 사뭇 인상적이었다.
당시에 그분을 ‘지각하는 부류’로 분류하는 사고 과정을 추적하기로 했다. 우선, 내가 속하지 않은 외집단을 분류 했다(나=정시출근러, 부서원=상습 지각범). 그러나 분류 과정에서 1) 외집단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2) 자신은 나름대로 다 알고 있다고 자만했으며 3) 그렇기에 그 집단보다 내가 더 우위에 있다는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라벨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멋쩍게 심리적 뒤통수를 긁으며 조용히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3. '남류 작가', '미망인'이란 단어의 수상함
‘남류 작가’라는 단어는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류’라는 말은 남성 작가들이 만들었을 것이고, 그것은 작가의 세계에서 남성이 주류였다는 걸 의미한다. 특정 집단이 우월해지기 위해선 주류, 비주류라는 라벨링이 필수이다. 그리고 이러한 라벨링은 상대적 우월감을 가진 권력집단만의 특권이다.
다음으로 의문이 든 단어는 ‘미망인’이었다. 미망인의 1차적 의미는 ‘아직 사망하지 않은 자’이고, 정확히는 죽은 남편을 따라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기에 아직 세상에 남아있는 자라는 뜻이다. 망(亡)이라는 한자어 때문에 직접적으로 사용을 꺼리는 단어였으나, 대중매체나 문학작품에서 사용될 때는 크게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단어는 가부장제의 꼭대기층인 남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단어이고, 가정의 존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성을 진시황제와 같이 매장한 병마용으로 치부하는 비상식적인 표현일 뿐이다.
나름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한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남성 중심적 사고를 담은 단어에 큰 저항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의 형성에는 젠더에서 나오는 권력이 주요했음을 아는 순간, 머릿속에는 ‘남자로 태어난 것은 권력이다.’라는 문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거꾸로 가는 남자는 없다’는 ‘여자로 태어난 것은 권력이다.’가 통하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양성 갈등을 보여준다. 성권력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컷&페이스트 한 세상은, 현실과 똑같은 젠더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권력의 이양은 갈등의 해결책일 수 없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4. 선물같은 평생의 숙제
두 작품은 내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선물했다.
1. 젠더갈등을 극복하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존중하는 동화 같은 세상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2. 그 과정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첫 단계는, 기존의 남성이 구축해놓은 현실의 성차별구조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시작점일 것이다. 역사에서 여성을 성녀, 악녀, 창녀로 심판하던 자들은 지배권력에 위치한 남성들이었다. 여성차별의 역사는 성경의 창세기에서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이 금기시한 선악과를 먹은 건 이브이고, 이를 아담에게 건네주기까지 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3가지 벌을 내리는데, 그중 2개는 이브 맞춤형 콘텐츠이다(끔찍한 산통과 남성에게 지배당할 운명). 특히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을 그리는 명화들에 대부분은 아담을 선량한 피해자처럼 그리고 있다.
이렇게 남성의 시점에서 서술된 역사의 배경과 그것이 유발한 여성차별과 억압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두 번째일 것이다. 그렇게 지금의 여성들이 외치는 건설적인 페미니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가 모든 행동의 바탕에 깔리도록 끊임없이 의식하며 행동하는 것은 평생의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