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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촌네글다방 Mar 22. 2024

도덕과 윤리 사이의 어딘가

감상문

0. 인트로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소개글


1. 첫인상: 놀라움 30%

독서모임의 어느 분께서 1월의 모임 책으로 이 책을 이야기하셨을 때, '뭔가 들어본 듯한데 안 들어본, 그러나 읽어보고 싶은 책'처럼 느껴졌다. 


단숨에 책을 집어 들면서 표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난 항상 책의 표지에 큰 의미를 둔다. 텍스트 위주의 책이 유일하게 시각적인 효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에 걸맞은 표지를 사용한 책은 훌륭한 파인 다이닝에 찰떡인 분위기와 인테리어를 갖춘 레스토랑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고, 이런 곳들은 항상 기대를 충족시켜 줬다.


이 책의 표지를 보면서 밀려온 감정은 놀라움 30%, 당혹감 40%, 실망감 30%였다. 


첫 번째로 놀라웠던 점은 에곤 쉴레의 그림을 표지에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클림트의 제자이면서 표현주의에 기반한 어두운 에로티시즘과 자화상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이란 재앙을 거쳐 28살의 나이에 요절했고, 특히 성에 관련한 수많은 추문과 함께했던 젊은 천재였다. 에곤 쉴레라는 이름은 몰라도, 거친 데생을 위주로 차갑게 여체를 표현한 특유의 누드화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고 독특하다. 


2. 왜 하필 에곤 쉴레?

자연스레 인상 깊게 읽은 민음사에서 출판한 <인간 실격(다자이 오사무 作)>이 떠올랐다. 이 책의 표지 또한 에곤 쉴레의 자화상을 표지로 삼고 있다. 그리고 소설의 내러티브와 에곤 쉴레 개인사,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가 상당히 유사하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세상과 타인을 과도할 정도로 두려워한다. 그리고 나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를 끝없이 비하하며 자신과 주변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일본이 패전국의 위치로 몰락한 1948년에 발표된 작품답게, 전쟁 직후의 시대상과 그러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본인(=주인공)의 심리를 리얼리즘 문체를 기반으로 블랙 코미디적인 위트를 곁들여 가며 심연까지 파고드는 방식이 끔찍하게 대단했기에 정말 재밌게 읽었던 작품이다. 


아마도 화가의 삶 자체도 당시의 시대상이 야기한 기근, 죽음, 그리고 부모에 대한 트라우마 등이 얽혀 복잡하고 우울했기에, 에곤 쉴레의 작품을 표지로 한 책의 특징은 시대상에 짓밟힌 인간의 내면을 관찰하는 것이 주요 특징일 수 있겠다고 짐작했다. 또한, 에곤 쉴레가 정면으로 다루던 누드화는 가장 개인적이기에 다양한 형태를 지닌 성개념을 소재로 삼았으며, 주저 없이 음모를 묘사할 정도로 적나라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마치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그랬듯이 인류가 가장 범용적이라고(혹은 범용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도덕과 윤리성을 나체로 현실에 등장시킴으로써 세상에 큰 논쟁을 일으켰다. 즉, 성과 육체를 다루는 예술작품의 주된 메시지인 '도덕과 윤리는 무엇이며, 그에 대한 기준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인가? 현시대에서 그것들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시하는 부분이 인간 실격에도 등장한다.


3. 앗, 40%의 실망감!

"정말 어마어마한 책이겠구먼."이라고 읊조리며 기대감을 레고성처럼 차근차근 조립하고 있을 무렵, 40%의 실망감을 마음의 해안에 토해내는 커다란 해일이 몰려왔고, 기대감은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에곤 쉴레의 작품의 대부분을 가려버리는 제목 문구와,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하버드 출신의 지식인이 출간한 글에서나 볼 것 같은 지젝의 논평, 그리고 "루카스+클라우스=나"와 같은, 의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상세한 설명충의 문구들은 그림을 느끼던 나의 감상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그리고 저 문구에 동의조차 할 수 없다.) 이것은 30%의 실망감으로 이어져, 출판사의 센스 없는 표지 디자인을 원망하는 내적 절규를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실망을 방지하기 위해선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했다.

표지가 깔끔해진 22년 재발행본


4. 자유분방+혼란스런 시점

이제 내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소설은 총 3부작이며, 루카스와 클라우스라는 쌍둥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시대와 장소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으나, 헝가리 국경 주변의 시골과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듯하다.(작가의 말에 따르면 K시는 실제로 작가가 헝가리 혁명으로 난민이 되기 전에 거주한 도시의 이니셜이라고 한다.) 그리고 1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2부는 헝가리 혁명의 전후, 3부는 헝가리가 자유진영 시대로 진입하는 시대로 추정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페이지를 넘길수록 혼란에 빠졌을 듯하다. 소설의 시점은 1인칭, 3인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를 무시하며 전개된다. 그 등장인물이 꽤나 많고 그들이 가지는 비중 또한 절대 적지 않지만 도대체 누가 누군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는데, 1부는 인칭 고유명사를 전혀 쓰지 않지만 2, 3부에서는 사람들을 이름으로 지칭하기에 그러한 혼란이 더 가중된다. 그리고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이야기하는 내용의 진실, 허구성을 모호하게 하는 떡밥들이 난무한다. 마치 1부에서 아빠와 같이 국경을 넘을 때 땅에 흩뿌려져 있던 지뢰들처럼, '거기가 있다고 믿되 깊숙이 밟아선 안 되는' 함정 같은 복선들이 너무 많게 느껴졌고, 추리소설을 읽을 때처럼 복선에 매몰되다 보니 메인 플롯에서 길을 잃고 미아가 돼버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구조의 이해에는 작가의 인터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소설은 본래 연작으로 기획하지 않았고, 약 2년여간의 공백을 두고 발표된 챕터들은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하더라.) 


5. 선물같은 수많은 질문들

전쟁과 이념이 지배하던 어둡고 참혹한 시대상, 그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의지하고 도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다양한 등장인물들, 삶의 목적과 방법, 올바른 교육관과 육아관 등 정말로 많은 개념을 실존주의적 측면에서 그려낸 듯한 이 작품은 두꺼운 페이지만큼이나 정말로 많은 철학적 질문에 자문자답 하게끔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질문은, 1부에서 쌍둥이가 주변인에게 부탁을 처리하는 내용에서 발생했다. 쌍둥이는 주변의 부탁에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기에 그 부탁을 들어줬다. 수간하는 언청이를 비난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줬으며, 언청이의 부탁을 받아 신부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고,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 달라는 언청이 엄마의 부탁으로 그녀를 집과 함께 불태워버린다. 도대체 이들의 행동을 도덕과 윤리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6. 마피아 문화(오메르타, 스니치)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도덕과 윤리는 서로 다른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도덕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공동체 및 개인의 가치관이며, 윤리는 집단에서 허용되는 행동을 규정하는 일종의 규칙이다. 마피아의 내부 규율인 '오메르타'를 예로 들어보자. 오메르타는 조직원이 체포됐을 때, 조직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정보를 절대 발설해선 안되는다는 불문율이다. 오메르타를 지켰을 경우 그는 영웅이 되지만, 어겼을 경우 그와 가족, 친척은 조직에 의해 '청소'되곤 했다.(여담으로, 갱단을 배신하는 멤버를 힙합에서는 '스니치(snitch)'라고 하며, 처벌 방식은 마피아와 비슷하다.)


마피아 영화의 걸작 <대부>

오메르타를 준수한다는 것은 인류라는 공동체의 입장에선 비도덕적이지만, 마피아라는 조직에서 보면 '직업윤리'를 충실히 수행한 모범적인 행위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폭력적으로 앗아가는 살인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마피아라는 조직의 유지될 수 있도록 정한 내부 규칙을 지켰다는 점에서는 윤리적인 것이다. 


7. 자신들의 방식으로 행하는 선, 판단은?

쌍둥이가 처했던 현실은 시대적 이념의 폭정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이다. 군인의 총칼, 그리고 폭격과 대포가 사람과 쥐의 생명을 동일하게 앗아가던 때, 그들이 지켜야 하는 도덕과 윤리는 생존을 위한 방법과 같이 항상 변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쌍둥이는 선과 악, 둘 중에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으며 주변을 판단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과 고통이 들이닥치더라도 그것을 견디기 위해 맨발로 다니며 서로의 등을 채찍질하며 훈련하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성스러운 고행자처럼 느껴기도 한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위안을 찾는 것이었다. 일례로, 언청이를 들먹이며 신부에게 수금을 해가던 쌍둥이는 언청이가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무렵 수금을 멈춘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신부를 위해 장작과 음식을 마련하여 제공한다. 외롭고 배고픈 신부를 위해 체스를 같이 두는 것은, 외로움을 이기고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신부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쌍둥이는 예배 참석은 거부한다. 왜냐면 종교는 선악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기 때문이고, 이것은 쌍둥이가 경계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쌍둥이의 도덕, 윤리관념이 일반인과 여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 1부에 나오는 구걸 에피소드이다. 구걸하면 어떤 기분일지를 알기 위해 한 아주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하고, 그 이유를 알게 된 아주머니는 쌍둥이를 욕하며 떠난다. 하지만 쌍둥이를 '빈곤한 자를 조롱하는 사이코패스'라고 놀릴 수 있을까? 쌍둥이는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쉽게 판단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실제로 느끼고자 했고, 그 이유를 상대방에게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적선받은 모든 물건을 버리는 와중에도 아주머니의 따뜻한 손길은 버리지 못하고 다시 한번 느끼는데, 이것은 아주머니가 보여준 인류애였으며 쌍둥이를 비난하기에 앞서 진심으로 그들을 걱정한 아주머니의 선한 본성, 행동의 본질이었음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발현된 폭력적인 도덕성은 절대 긍정적일 수 없다고. 과연 그럴까? 


8. 책은 어둡고 비릿한 잔향을 남기고

때론 너무 좋은 영화, 책, 그리고 사람을 만났을 때 "왜 좋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을 열심히 찾을 때가 있다. 하지만 결국은 "그냥, 너무 좋아."라는 단 한마디밖에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들이 나에게 선사해 준 감정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에,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여자친구가 "내가 왜 좋아?"라고 물어보면 "네가 좋은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면, 그 사람은 사랑에 있어선 아마추어일 거야."라고 대답하곤 한다.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이러한 질문들이 잔향을 풍기며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다. 이러한 책은 <전쟁의 슬픔>을 읽은 뒤로 정말 오랜만이다. 그렇기에, 이 책 또한 "그냥 좋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겠다. 너무 복잡하게 좋고, 읽은 뒤의 잔향도 복잡하게 진한 책. 이러한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더 오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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