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16
제가 처음 과일 장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과일을 품종별로 판매하는 문화가 없었습니다. 같은 천도복숭아라고 해도 품종별로 다 맛과 향이 다른데 대형 마트에 가도 그냥 '천도복숭아'라고만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냥 황도, 백도로 판매하는 곳도 많습니다.
과거(불과 몇 해 전) 오프라인 중심의 유통문화에서 생각해보면 대형 유통사의 편의 때문입니다.(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그럼에도 그 시절 저는 소비자의 취향은 갈수록 세분화될 것이고 품종을 구분하는 방식이 곧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했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십여 년이 흘렀고 공씨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제 소비자들 사이에서 품종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작용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특정 품종만 주목받는 현상입니다.
최근 과일 판매업체 SNS 광고를 보면 유독 많이 등장하는 품종들이 있습니다. 천도복숭아는 신비, 털복숭아는 대극천, 포도는 샤인 머스캣. 다른 품종들은 무의미한 것처럼 너나 할 것 없이 온통 난리법석입니다. 새로운 품종에 열광하는 것이 MZ세대 쇼핑의 특징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보태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기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유행을 만들었든지(거의 99%) 자연스럽게 알려졌든지 간에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면 공급이 안정될 때까지 가격은 계속 올라갑니다. 그런데 좀 지나치게 많이 올라갑니다.
재배기술이 어렵거나 수확량이 적거나 하는 생산적인 이슈로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높게 가격을 형성하는 최근 시장의 분위기를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많습니다. 저는 이러한 방식으로 가격이 요동치는 것을 무척 경계하는 유통인 입니다.
제가 아직까지 천도복숭아 신비를 판매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장이 안정화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공판장 가격을 보면 신비가 다른 천도복숭아의 3배 정도가 됩니다. 자연스럽게 천도를 재배하는 농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신비로 품종 갱신을 합니다.
늘 반복됩니다. 무엇이 돈이 좀 된다 싶으면 너도 나도 갈아탑니다. 경산은 천도복숭아 주산지로도 유명하지만 거봉의 주산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3년여 전부터 샤인 머스캣 바람이 불면서 과거 거봉 밭이었던 곳은 현재 거의 대부분 샤인 머스캣 밭으로 바뀌었습니다. (제 눈으로 확인)
신비라는 품종은 예전에 한번 농가에 보급이 되었다가 핵할(씨가 갈라지는) 증상이 너무 심해서 다들 베어내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소위 말하는 역주행을 한 겁니다.
하나의 과일 품종을 육종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많은 연구과 시험 그리고 시험 재배까지. 그리고 실제로 농사를 지었을 때 농가 입장에서 안정적인 소득이 나올 수 있는지도 확인을 해야 합니다. 안정적인 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병충해에 취약하지 않은 녀석인지, 수확량은 안정적인지 등이 고려요소일 것입니다. 맛은 좋은데 수확량이 너무 안 나온다든지 혹은 재배가 너무 까다롭다든지 하면 많은 농민들이 농사짓기 어려울 테니까요.
일본 품종 일색에서 국산 품종으로 전환한 것만 해도 대단한 딸기 판에서 얼마 전부터는 왜 딸기는 설향밖에 없냐고 딸기의 다양한 품종 운운하며 신품종의 딸기를 열렬하게 홍보하는 업체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딸기를 재배하는 농민의 입장에서 설향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품종입니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유통인이 부추기죠) 농가에서는 안정적인 품종을 찾습니다.
과일의 품종이 유행을 타는 것은 농산물의 건강한 생태계에 방해 요소 이기도 합니다. 토마토 같은 1년생 작물들과 달리 나무에서 재배하는 과일들은 보통 새로 접을 붙여서 과일을 수확하는 데까지 짧게는 2년 길게는 3년이 걸립니다. 안정적인 수확량을 내는 데까지는 짧아도 보통 3년을 잡습니다. 유행을 따라가는 건 농민 입장에서는 도박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품종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품종으로 인해서 종의 다양성이 축소되거나 기존 재배하던 품종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며칠 전 청도에서 복숭아 한 박스를 보내주셨습니다. 올해 첫 수확을 시작한 국내 육종 신품종인데 이미 올해 공판장 가격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 분위기를 생각하면 저는 걱정부터 앞섭니다.
그냥 여러 복숭아 중에 하나일 뿐인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