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불가항력 (보선이 눈재에게 3)

by 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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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생의 비극성을 깨우치고도 살아있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서야!’


눈재 님이 전해주신 글에서 이 문구가 강렬히 와 닿았어요.

저는 꽤 염세적인 편이거든요. 영혼이나 운명은 없으며 생명에도 의미가 없다고 믿지요. 제가 생과 떨어지지 않도록 묶인 사슬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몰랐다면 마음 편히 죽음을 선택했겠지만 이미 태어나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랑을 느낀 이상, 무의 상태로 풀려나긴 불가능하죠.


눈재 님과 저는 접하는 구석이 많은 듯해요. 저번 편지에서 제가 평소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이를테면 진실, 사랑, 비극, 염두, 생, 삶, 뜻 없는 것, 체념이요. 한때는 뜻이 없는 것에서 뜻을 찾고자 헤매고 그 사실을 되새기며 빙빙 돌아다녔어요. 그러다가 세상에 의미가 없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이란 걸 깨달아서, 더는 되묻지 않게 되었어요. 지금은 그저 사랑을 즐기고자 노력합니다. 사슬을 더 단단히 묶고 그 사슬을 사랑하기로 했어요. 생의 의지가 타자의 고통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자라났으니,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으며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고 싶어요.


군대란 이미 폭력적인데 그곳에 소수자 혐오까지 있으니…. 사회가 폭력적인 게 사실이니 무슨 말을 덧붙일지 모르겠어요. 그저 제 안에 어지럽게 맴도는 답답함을 느껴볼 뿐입니다. 저는 성별 구분 없이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팬섹슈얼입니다. 지정성별이 남성인 사람과만 연애해봤습니다. 살면서 끌리는 여성도 있었고 새로운 퀴어 여성들과 만날 기회도 있었지만 저는 두려움에 다가가질 못했어요. 소수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상상만으로도 힘들었거든요. 남성을 만나는 건 완벽히 안전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위험을 감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 개인과의 갈등은 그 한 명과의 일이지만, 제가 소수자가 되면 사회 전체와 갈등이 빚는 일이 되어버리니, 저는 그만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MBTI도 인간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누던데, 사람을 여자, 남자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서 누군가의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건 오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서로 개별적 존재임을 인정하며 내가 나로 살면 될 텐데, 세상은 개별화를 경계하고 있나 봐요.


우리는 꽤 괜찮은 사이 같아요. 저는 눈재 님과 이야기 주고받는 일이 즐거워요. 관계 맺으며 상처를 주고받는 건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미숙하지만 상처를 감수하고 관계를 잇느냐,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고립하느냐, 선택의 문제인 듯해요. 저와 눈재 님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품고 태어난 듯합니다. 그래서 계속 관계가 이어지고 풀리고 때론 날카롭게 끊어지는 과정을 지난하게 이어가고 있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우리 서로의 삶에 사랑이 어떻게 익어갈지 관찰해줍시다.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네요.

저는 사랑을 굳이 긍정하진 않지만 불가항력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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