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은 세상 (눈재가 보선에게 3)

by 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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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선님에게


연애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니, 마음 한켠을 지지해주는 좋은 관계인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하네요. 제가 느끼는 사랑에서 비롯된 슬픔이 궁금하시다 하셨는데, 저의 대부분의 슬픔은 생을 사랑해서 생기는 것 같아요. 못나고 아픈 세상을 사랑하니 저 또한 못나고 아파지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꽃이 진 자리에 다시 씨앗을 심는 것이 생을 사랑하는 것이니, 제가 가야 할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번 주에 보내야 할 편지를 한주 미뤄서 보내게 되었는데요. 군입대 판정 검사가 있었습니다. 현재 남성으로 지정된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인 저는 주민번호 뒷자리 첫 번째가 3번이고, 수많은 3번들이 모인 곳에서 검사를 치렀습니다. 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며 그 자리에서 숨을 참고 있었는데 결과는 재검 판정을 받았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4년 정도 받아서 현역을 피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형적인 우울증 증상이 아니란 이유로 6개월 뒤에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성주체성 장애 판정도 받았지만, 호르몬치료를 6개월 이상 진행하지 않아 상관없는 일이 되었고요. 잠시 정신이 마비된 채로 이 소식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하다, 며칠 동안 잠만 자고, 오늘에서야 정신을 차려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트랜스젠더로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때론 너무 버거워서, 내딛는 걸음마다 절벽 밑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때라는 생각이 드네요. 한동안 읽지도, 쓰지도 못하니 마음 또한 갈 길을 잃은 느낌이에요. 이렇게 소식을 전하는 것 또한 조금은 나아지고 있다는 뜻일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시길 바랍니다.


저의 현 상태를 설명했으니 다시 사랑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영 재능이 없는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떠나보냈어요. 때론 제가 너무 무거운 마음을 전했다거나, 때론 제가 상대방이 원하는 관계 형식에 맞춰주지 못했다거나 하는 형식이었어요. 각자 나름대로 기대하는 서로가 아니었으니 떠나게 된 것이지요. 지금은 나름대로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사랑을 잘 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꽤나 최근에 깨달은 것 같아요.


또 하나 생각이 드는 것은, 세상에 대한 체념을 생존을 위해 육화하고 있다는 것. 생각보다 세상은 아름답지 않고, 거짓말을 믿으며 살다가는 언젠가 세상에게 복수 당할 것이란 것. 우리의 눈은 현실보다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것. 이렇게까지 비관적일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극대화 시켜야만이 보이는 진실이 있다는 것. 이처럼 세상에 대한 기대 없이 살다 보니 슬픔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기어코 생의 비극성을 깨우치고도 살아있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서야! 보선님은 어떤 이유로 삶을 잇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본래 삶은 뜻 없는 것이지만, 나름의 이유를 붙여보자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눈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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