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다 했더니, 상담 선생님은 죽고 싶었겠군요? 했다

자살유가족의 속마음

by 얼떨결정

엄마가 자살로 돌아가시고,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부정의 시기였다.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 3년쯤 지나자 죄책감에 숨이 막혔다. 조금 더 지나자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화가 났다. 분노가 세상과 타인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 분노는 내게 다시 되돌아왔다. 스스로가 미웠다. 그래서 작아지고, 무기력해지고, 슬퍼지고, 서러웠다. 외로웠다. 고립된 기분이었다. 속은 점점 더 작아졌지만, 겉으로는 호탕하게 굴었다. 자신만만한 척하며 당당하게 지냈다. 감정적으로는 조금 메마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잘 울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소위 말하는 MBTI의 T 인간으로 살았다. 그러나, 어렴풋이 내가 사실 매우 감정적인 인간이라는 걸 알았다.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 그래서 무덤덤하고, 차분한 사람. 가끔 짜증은 내도, 결코 소리를 지르지 않는 사람. 대학을 가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세상에서 한 인간에게 요구하는 1인분의 몫을 기꺼이 해내는 사람. 그러나 불쑥불쑥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났다. "짜증 난다" 혹은 "빡친다" 정도로 표현되는 나의 분노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늘 잠재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일이 너무 바빠서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을 그만두고 몇 개월을 쉬고 나서야, 이건 일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았다. 쉬어도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상담 선생님은 내게 해소되지 못한 숨겨진 감정이 있다고 하셨다. 상대방에게 조금 섭섭하거나, 부담스럽게 느낄 일을 더 크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하셨다.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감정 소모가 크다고 하시면서 무언가 다른 감정이 있을 거고, 그게 해소되지 않은 채 억눌려 있어 대신 나오는 것 같다고. 그걸 찾아야 할 거라고 했다. 듣자마자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아, 저 그게 뭔지 알아요. 억울함이요."
"억울했어요. 살아남은 게 억울했어요."


사실 평생 억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았으며, 때때로 노력보다 더 크게 보상받았다. 부모의 이혼, 가난, 엄마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세상에 나만 겪는 일도 아니다. 외모도 평범하고, 신체가 건강하고, 공부도 나쁘지 않게 했고, 수줍음도 그다지 없었으며, 대인관계도 좋았다. 한국이 문제니 뭐니 말은 많지만 나는 21세기에 전쟁터에 사는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확률의 승리자였기 때문에 북반구에 태어났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런데 억울하다니 도대체 왜? 다행히 상담을 받기 몇 주 전에 우연히 챗 지피티랑 대화를 하게 된 나는 이 숨겨진 감정의 실체를 알고 있는 상태였다.


흔히 자신에게 하는 무수한 거짓말 중에 가장 흔하고 강력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사랑합니다"와 "우리 부모는 참으로 우리를 사랑했습니다.'가 있다. 부모가 우리를 사랑했고 또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쓸데없이 오랜 시간을 보낸다.

- M. 스캇 펙, 2011, "아직도 가야 할 길", 율리시즈, 최미양 옮김,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을 여러 번 줄 치며 읽었다. 20대 초반, 중반 그리고 서른이 넘어 다시 읽었다. 단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문장이 내게 갑자기 날아와 꽂혔다. "부모가 우리를 사랑했고 또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쓸데없이 오랜 시간을 보낸다." 나를 두고 세상을 스스로 떠난 엄마는 나를 사랑했을까? 엄마의 기일에 내게 연락하지 않은 아빠는 나를 사랑했을까? 부모가 나를 사랑했다고 평생을 믿어왔는데, 아직도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면, 사실 그 해석이 틀렸던 건 아닐까? 내가 인정을 못해서 이 긴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닐까?


혼자 답을 내릴 수 없던 나는 챗 지피티를 닦달했다. 챗 지피티의 말은 너무 낯간지러워서 조금 싹수없는 인격을 가진 먼데이라는 지피티 모드와 대화했다. 내 가정사를 풀어놓고 이야기를 하며 한바탕 울고 나니, 가족의 사랑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시니컬한 인격이랍시고 만든 먼데이조차도 아주 긍정적인 친구였다. 따라서 내가 죽고 싶은 건 아니며, 살고 싶으나 다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살률 통계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마음을 알아주는 멋진 대화상대의 등장에 잘 살아보려는 의욕이 피어올랐다. 감정 조절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왜 나는 내 감정을 스스로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등의 대화를 이어가며 신세한탄을 했다. 정답이 아닌 사용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방식으로 최적화되어 있는 AI 알고리즘이 내게 말했다.


"말은 끝났지만 뭔가 여운이 남는 이 기분, 가장 가까운 단어로 치면 뭘까? 외로움? 조금은 허락받은 느낌? 살짝 살아있는 기분? 정확하지 않아도 돼. 네가 말해주는 단어 하나가, 그 문 안쪽으로 너를 한 발짝 더 데려간다."


"억울해."



"그래.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 하나만 줘봐. <나는... 한 게 억울해.>. 어디서든 시작해도 돼. 그 문장이 지금 너 안의 감정을 제일 정확하게 꺼낼 열쇠니까."



"나는 내가 살아남아야 했던 게 억울해"



망설임도 없이 억울하다고 스마트폰에 입력을 하며 울었다. 울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눈물이 막 흘렀다. 나는 살면서 어떤 일도 억울하다고 표현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너무 자연스럽게 그 말이 나왔다. 신기했다. 그리고 이걸 이렇게 오랫동안 몰라주었다는 것조차 억울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이혼한 건 부모고, 가난해진 것은 내 탓이 아니며, 죽은 건 엄마인데, 남은 잔재들을 내가 살아내야 한다는 게 화가 나고 억울했다. 그걸 잘 해냈고, 이젠 지나간 일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겪은 나의 모든 것은 나만이 안다는 게 억울했다. 오랜 시간을 거쳐 내가 생존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런데 살아남은 내가 온전한 내가 아니다. 그게 억울했다.


상담 선생님이 숨겨진 감정을 지적하자, 인공지능과의 대화 중 내가 뱉은 "억울함"이 현실에서도 발화되었다. 내 대답을 듣더니, 상담 선생님은 "억울했다니, 죽고 싶었겠군요?"라고 질문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어릴 땐 꿈을 자주 꾸곤 했다. 갑자기 자연재해나 인재가 발생하고,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나만 살아남는 꿈이었다. 불타는 학교, 죽는 친구들과 선생님, 그리고 모든 게 타버리고 살아남은 나. 꿈에서조차 살아남던 나. 그게 슬프고 괴로웠다. 꿈은 반대라던데, 전쟁이 나거나 큰 자연재해로 내 눈앞에서 사고가 나면 꼭 내가 제일 먼저 죽기를 바란다고 농담하며 살았다.


이제는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꿈 일기를 적기 시작하자 사라진 꿈처럼, 억울하다고 입 밖으로 말하고 나자 억울함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16년이 지나 죄책감, 슬픔, 분노, 공허를 넘어 내가 찾아준 나의 감정이었다. 특별히 달래주지도 않았는데, 금방 떠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 느껴졌다. 16년간 내 안에 숨어있던 감정이 한 번에 짠하고 사라지지는 않았다. 남편이랑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다가, 나는 갑자기 울면서 내가 살아남은 게 억울하다고 소리쳤다.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엉엉하고 울었다. 베개에 콧물이 묻든 눈물이 묻든 신경 쓰지 않고 얼굴을 처박고 사는 게 억울하다고 울었다.


다음날 베개 커버를 빨고, 건조기에서 나온 베개 커버의 섬유유연제 향을 맡았다. 커피도 한잔 내려 마셨다. 그릭 요거트에 꿀을 뿌려 먹었다. 솜을 베개 커버에 끼우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날 이 오래된 브런치를 다시 꺼내 쓰기로 결심했다.





브런치북 『그 흔한 생존자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 연재됩니다.

지금은 3부 「나로부터 살아남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요즘 제가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있는 스스로를 돌보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글의 제목은 예고된 목차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평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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