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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떨결정 Apr 02. 2021

이거 되게 귀한 거야, 놓치지 마.

파도 기다리기

보드에 누워있는데, 아주 작은 물결 같은 파도가 다가온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파도가 아니라 그냥 잔 물결이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작은 물결이 보드 밑을 꿀렁하고 지나가는 걸 느낀다.

7월이었다. 평화로웠다.


먼바다를 쳐다본다. 먼바다를 보면서 잘 분간도 안 되는 물결 중에 어떤 게 내가 시도할 만한 파도인지 계속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 파도 직전의 파도가 지나갈 때 보드를 돌리고 패들을 가볍게 시작한다. 내게 오기 전에 깨지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면서도(분간할 눈썰미가 아직 없다) 어느 쪽에 파도의 힘이 있는지, 시도하는 다른 사람은 없는지 양옆을 계속 보면서 패들을 한다. 파도가 아주 가까이 와서 내 발 끝을 올려주는 느낌이 들면 더 열심히 힘차게 패들 한다. 잡았다는 느낌이 들면 테이크 오프를 빠르게 하려고 시도한다. 놓치거나, 넘어지거나, 조금 가다가 넘어진다.

3월이었다. 행복했다.


서핑을 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평화로운 것도 좋고, 무언가 시도하는 것은 즐거우며, 성공하면 행복하다.

서핑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하지만 서핑은 파도라는 자연이 덧붙여 그 성공이 오로지 나만의 것이 아님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때 때맞춰 내게 다가와준 파도, 그때 때맞춰 시도하지 않은 다른 서퍼들. 그리고 내가 가려는 경로에 아무도 없는 바다. 물론 가려는 경로를 조정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어서, 그냥 직선에 아무도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 바다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나는 발리나 하와이에 살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서울에 산다고 불평하지만, 가끔 깨닫는다. 나는 바다가 있는 나라에 사는구나. 생각보다 많은 나라가 대륙에 다른 나라와 동서남북 사면을 맞대고 있다. 좋은 파도가 늘 있는 것은 아니고, 사계절이 있지만 그래도 바다가 있는 나라, 행운이다.


서핑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윌리엄 피네건이 쓴 ‘바바리안 데이즈’를 읽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성가실 정도로 얽힌다. 파도는 경기장이었다. 파도는 목표였다. 동시에 파도는 적수이고, 복수의 여신이며, 심지어 철전 지원수였다. 그리고 서핑은 피난처, 행복한 은신처였지만 살아남기 힘든 황야이기도 했다. 47쪽
역동적이고 무심한 세계. 열세 살 나이에 나는 신을 향한 믿음을 대체로 버렸지만, 이것은 새로운 발전이었다. 서핑은 내 세계에 구멍을, 내가 버려졌다는 느낌을 남겼다. 대양은 보살펴주지 않는 신, 끝없이 위험하고 가늠할 수 없이 강력한 힘과 같았다. 47쪽
보통은 그런 일이 없었으나 나를 두 번, 심지어는 세 번까지 약 올린 파도도 있었다. 저 앞에 빠르게 속도를 내는 햇빛 구멍이 생기고, 파도는 나를 앞질러 갔다가 멈춘 후, 다시 나를 향해 되감겼다가, 카메라 렌즈의 조리개가 열리듯 파도의 입술 부분이 빙글빙글 돌았다. 내가 마침내 구멍에서 빠져나오자, 파도는 다시 뒤집히며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아름다운 절망으로 물러갔다가 한층 더 아름다운 희망으로 돌아오기. 내 생애에서 가장 길게, 튜브에서 타본 경험이었다. 384쪽.


나는 파도를 제대로 잡지도 못하는데, 라인업에 사람이 많이 있으면 내가 방해가 될 게 너무 뻔해서 조심스러워졌다. 그럴 날은 한참 먼 미래지만, 라인업의 신경전을 겪기도 전에 상상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람들이 파도를 따라 라인업을 옮겨갈 때 나는 파도의 숄더에 계속 남아있다. 언젠가는 나도 같이 옮겨가고, 서로의 눈치를 볼 걸 안다. 파도가 크든, 작든, 실력이 어떻든.


초보자에게 서퍼들은 너그럽다.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았을 때, 내가 조심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일 때 서퍼들은 초보자인 내게 너그러움을 베푼다. 죄송하다는 내 말에 괜찮다고 흔쾌히 답하고, 내가 괜찮은 지 물어준다.


내가 잡은 파도가 나를 조금이라도 옮겨주고, 그때 내가 느끼는 자유로운 듯한 짧은 순간은 신비롭다. 영상으로 보면 정말 너무 짧은 라이딩인데, 그 순간 나는 아주 긴 거리를 가고 있다.


파도는 기본적으로 내게 무심하다. 큰 파도도 작은 파도도 내가 어떤 상태로 있든 나를 덮친다. 무섭다. 파도를 놓칠 땐 아쉽다. 바로 라인업으로 다시 가지 못하고, 연이어 오는 파도에 휘말릴 때면 더 아쉽다. 그렇게 기다리던 게 계속 온다고 신경질을 낸다.


파도는 다시 또 온다. 어쩌면(아마 확실히?) 나는 배럴이나 튜브 같은 건 내 평생 시도조차 못해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작은 무릎 파도를 타는 기분도 한층 더 아름다운 희망으로 돌아온다는 게 뭔지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첫 강습을 7월 말에 받았다. 파도가 없는 잔잔한 호수 같은 바다였다.

강습이 끝나고, 밀어 타기 하는 방법을 알려주다가 갑자기 보드에 눕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거 되게 귀한 거야. 놓치지 마.’


나는 파도를 잡는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도 모르면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바다를 볼 때도, 평소에 일을 할 때도 문득 그 말이 생각났다. 또 오는 건데 왜 귀할까? 뭔가를 귀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것이 명확하게 자기 소유가 아닌, 자연의 작은 일부일 때 그건 얼마나 귀하게 느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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