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존재하는 수고로움!

- 백수린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고

by 보리별

그녀는 무얼 할까... 궁금해진다.

오래된 동네의 방 안에서 봉봉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밥은 먹었을까...


<여름날의 빌라>라는 책으로 백수린 작가를 처음 만났다. 삶은 우연으로 이루어진 필연이라는데, 그 책은 딸아이의 친구에게 선물 받았다. 딸아이의 오랜 친구 R는 작년에 다리 화상을 크게 입었다. 사고의 이유는 어이없었다. 보온병에 더운물을 넣어놓았는데 병을 여는 순간 폭발해서 다리로 뜨거운 물이 튀었다고 한다. 한 여름에 화상전문 병원에서 고생하는 아이가 안쓰러워 반찬을 좀 해서 보냈는데 아이가 책을 선물받았다. 서점에서 그냥 골랐다고 한다. 단편소설집이었는데 내용이 좋아서 천천히 2번 읽었다.


지난주 제주여행 가서 우연히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만났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여행자의 들뜬 기분으로 데리고 왔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다는 행위가 관념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것들, 물질성이랄지 육체성을 가진 것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는 눈이 오면 허리가 아플 때까지 집 앞의 골목을 쓸어야 하고(겨울마다 서울에는 눈이 얼마나 자주 오는지!)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정화조 청소업체를 직접 불러 나의 배설물 냄새를 맡아야 한다. >


그녀는 주택살이를 해보고 싶어서 서울 성곽 어딘가에 집을 얻었다고 한다. 오래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였다고 한다. 나는 어릴 적 주택살이를 했다. 그때는 모두가 그랬고 결혼 후 아파트로 옮겼다. 작가는 어릴 적 아파트에서 자란 세대인 것 같는데 처음 경험하는 주택이라는 공간과 동네에 대한 묘사에 마음이 찡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마을버스조차 다니지 못하는 비좁은 비탈을 걸어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내가 모자란 인간인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감이 밀려온다. 어쩌면.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어차피 나란 존재는 후회가 습관인 인간이므로, 아직까지는 조금만 더 이 불편함을, 풍요롭게 흘러넘치는 고요와 시시로 찾아오는 뜻밖의 소란을, 방바닥에 누워 창밖을 내다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터다란 나무의 우듬지를, 옥상에서 맥주를 마시며 감상하는 노을의 시간을, 먼 곳의 개 짖는 소리와 담벼락 아래의 고양이 우는 소리를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고 만다.>


<언니의 창문을 보며, 하나둘씩 빛이 차오르는 이웃들의 창문을 보며,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게 하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힘에 대해서 이따금씩 생각을 해본다. --- 우리는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나는 자리마다 놓인 뜻밖의 행운과 불행, 만남과 이별 사이를 그저 묵묵히 걸어 나간다. 서로 안의 고독과 연약함을 가만히 응시하고 보듬으면서.>


이런 글들이 흘러나온다. 작가가 사는 공간, 그녀 친구들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적인 영역이다. 사람을 오래 만나도 사적인 부분까지 알기는 쉽지 않다. 시간이 없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에 익숙하지도 않다. 나의 경우도 과거라면 트라우마적 사건을 울면서 토해낼 줄 만 알지 소소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그려낼 줄은 모르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원하는 단어를 고르면 라벨지에 적어 병에 붙여주겠다는 가게 주인의 말에 라벤더 꿀과 바닐라 꿀에 각가 '기쁨'과 '다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울적하거나 화가 나 기쁨이나 다정이 유난히 부족하게 느껴지는 날들에 나는 용도에 맞는 꿀을 조금씩 꺼내 먹으며 날서 있던 마음들을 조금씩 달랬다.>


<촘촘한 결로 세분되는 행복의 감각들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결국은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므로.>


<할머니는 영원히 모르시겠지.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무엇에도 훼손되지 않는 단단하고 순결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는 사실을.>


<높은 지대에 올라가 내려다본 동네는 희미한 빛 속에서 저마다 서사를 품고 늙어가는 집들과 골목들이 얽힌 고요한 세계였다.>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자 폭설이 내리는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고양이들이 다시 골목 위를 거닐었다. 사뿐사뿐 춤추듯, 가볍게. 골목의 얼음은 모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내 집에서 오늘도 쓰고, 또 산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 날마다 분투하면서.>


<봄볕 아래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런 것 따윈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오후의 몇 시간 동안 나는 그저 행복했다.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행복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행복은 지속되는 것아 아니라 깊은 밤 찾아오는 도둑눈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사라지는 찰나적인 감각이란 걸 아는 나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녀의 방에 불이 켜지는 걸 상상한다. 글을 타박타박 적고 있겠지. 수고로움으로 가득 찬 그녀의 일상이 글이 되어 나에게 왔다. 나는 그녀의 글 속에서 잊혀진 내 일상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느 순간인지는 모른다. 뱃속이 짜르르하고 가슴이 활짝 열려 내 안의 나를, '있는 줄'도 몰랐던 나를 만나는 순간들이 있다. 그날의 느낌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도 그랬던 걸까... 그녀가 길어 올린 사유는 군더더기 없이 서늘했다.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기도 했고 찌르는 듯이 아파도 자기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나직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우리는 왜 글을 쓰고 읽을까?

'모자란 인간'이라는 자책을 하기도 하고 불편한 일상을 감내하고 뭔가를 찾으면서 왜 굳이 쓰고 있을까? 젊은 여성이 겁도 없이, 봄날의 새싹처럼 글쓰기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까닭은 무얼까.


촘촘하고 다채로운 시간을 결을 보여주고 싶었던걸까?


그녀의 글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답잖아... 좀 봐봐...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 준 맑은 눈의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나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한다.


밥 한 번 먹자고 말해 볼까...

깊은 밤 도둑눈처럼 찾아와 아름답게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찰나적 감각에 대해 나누어보면 어떨까...

keyword
이전 12화바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