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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별 Oct 17. 2022

오월의 김치

김치는 손이 많이 간다. 큰 며느리로 사신 엄마는 겨울이 되면 배추를 백 포기 넘게 마당에 부려놓고 절이고 씻고 하셨다. 김치 담는 날은 고모도 오고 작은 엄마도 오셨다. 우리는 신이 났지만 엄마는 힘이 드셨을 거다. 추운 겨울에 마당에서 배추를 절이는 일, 씻는 일, 양념을 준비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결혼 후 김치는 어머님이 해주시는 걸 얻어먹다가 어머님이 편찮으신 해에 김장에 도전했다. 2009년 즈음이었다. 절임 배추가 판매되고 있었다. 용감하게 30킬로를 주문해서 김장을 했다. 양념은 인터넷에 나와 있는 대로 계량해서 준비했다. 절임배추는 무게가 정확하게 배달되었다. 그래서 양념과 배추 양이 딱 맞게 떨어진다. 처음 담았는데 너무 맛있었다. ‘우와! 내가 김장을 하다니’ 40킬로를 더 주문해서 담았다. 이듬해 여름까지 잘 먹었다. 그렇게 10년을 남편과 아이들과 같이 배추에 양념을 바르면서 김장을 했다.

 김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춧가루였다. 지금은 인터넷에서도 건고추와 고춧가루를 팔지만 그때는 친척이 있는 시골에 부탁하거나 영천장 같은 큰 시장에 가서 잘 보고 사야 했다. 고춧가루 맛은 비슷한 줄 알았는데 몇 번 사보니 아니었다. 어떤 것은 매콤하면서 단맛이 나고 어떤 것은 그냥 매운맛만 났다. 건고추를 사 오면 일이 많다. 행주로 깨끗이 닦아야 된다. 꼭지 부분의 자글자글한 곳에 먼지가 꽤 많다. 엄마는 꼭 닦아야 된다고 하셨다. 이제  엄마에게 고춧가루 달라고 하기는 민망한 나이다. 작년에 엄마가 준 고춧가루를 다 먹어가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건고추를 찾아보았다. 좋아 보이는 집에 3kg를 주문했다. 꼭지는 자른 고추였다. 고춧가루는 한 근을 600g으로 잡는 것 같았다.

 건고추가 배송되었다.  ‘저거 닦아야 되는데, 닦아야 되는데...’ 하면서 보름 넘게 미루고 있었다. 큰아이에게 김치를 보내야 돼서 한가한 토요일 밤에 남편이랑 고추를  닦기 시작했다. 요즘 수영 배우느라 온몸이 아픈 나는 고추 닦다가 아이고... 아이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몇 번 드러누웠다. 다음날 장바구니에 고추를 담고 방앗간에 가서 가루 내어 왔다. 여섯 근이라 하셨다.


 요사이 총각무가 한창이다. 겨울 무는 심이 생기고 질겨져서 맛이 없다. 봄이 되면 날씨 좋다고 '하하 호호’하고 놀러 다녔다. 그런데 이번 오월에는 총각김치 한 번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총각무는 시장에 잠시 나오다가 사라진다. 무 손질하기가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한 번도 담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손질된 총각무를 찾아보니 좀 비쌌다. 동네 야채 가게를 지나가면서 총각무가 있는지 살폈다. 마침 보인다. 자전거를 끌고 갔다. ‘이거 전부 몇 단이예요?’ 4단이라 하신다. ‘이거 자전거 장바구니에 들어갈까요?’ '아니, 안돼요. 배달해 드릴게요.' 너무 감사했다. 현관에 총각무를 펼쳐 놓고 잎 부분은 잘랐다. 식구들이 잘 안 먹어서 잎은 조금만 남기고 다 버렸다. 마침 쌀 포대가 있어서 현관 바닥에 깔고 손질한 무를 올려놓고 신문지를 잘 덮어놓았다. ‘내일 남편 오면 같이 담아야지.’ 그날 남편은 옛 친구들을 만나러 충청도에 갔다.


 남편은 마트를 가서 단배추도 3단 사 왔다. 남편은 총각무 껍질을 열심히 깎았다. 쇠 수세미로 적당히 흙을 닦아내고 흠집 난 부분만 도려냈으면 싶었는데 남편이 안된다고 한다. 남편 말대로 했다. 열심히 깎아내고 소금에 절였다. 일을 마친 남편이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요즘은 껍질을 안 깎는다고 말한다. 그 봐봐... 그냥 하자니까, 남편은  음식 할 때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제는 그냥 '예'한다. 혼자 다 하면 힘드니까. 총각무김치를 통에 차곡차곡 넣는다. 딸에게 보낼 것은 김장봉투에 넣어 둔다. 그리고 우리는 뻗어버렸다.


 딸아이가 여름옷도 보내달라고 한다. 분리수거하는 곳에 가보니 적당한 박스가 하나 있다. 들고 와서 신문지를 깔고 옷을 담았다. 옷은 집 앞에서 수거해가는 홈픽에 접수시킨다. 홈픽은 2박 3일 정도 걸린다. 그래서 김치는 우체국에서 보낸다. 월요일 아침 자전거 바구니 위에 스티로폼 박스를 올리고 잘 묶어본다. 묶다가 자전거가 넘어졌다. 이런! 화가 난다. 기우뚱거리면서 자전거를 끌고 우체국에 가서 김치를 보낸다. 월요일인데도 조용하다. 빨리 접수해서 기분이 좋다. 남편이 준 스타벅스 쿠폰으로 샌드위치를 사들고 집으로 온다. 할 일을 마친 홀가분함이 밀려든다. 샌드위치가 아주 맛있다.


 오월이면 어디로 놀러 가야 되나 궁리를 많이 했다. 이제는 놀만큼 놀았는지 그다지 가고 싶은 곳도, 가고 싶은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총각김치를 담았으니 이제 명이나물 장아찌를 담아볼까. 나이가 이런 건지, 재미없는 사람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딸아이가 맛있게 먹으면 좋겠다. 점심에 젓갈 넣지 않은 총각김치를 꺼내 갈비탕과 먹었는데 꿀맛이었다. 반찬가게에서 사 먹으면 몸이 편해서 좋고 집에서 해 먹으면 뿌듯해서 좋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많이 행복한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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