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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선 Jan 27. 2024

탈락 문자

얼마 전 유튜브를 보는데 취업 탈락 문자와 관련된 예능을 보게 되었다. 사실 나를 떨어뜨린 회사에서 아무리 정성껏 장문의 내용을 써도 결국 탈락은 탈락이다. 그렇다고 내용이 너무 담백하게 오면 또 그것대로 무성의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러면 어쩌라고...? 취업 준비생 입장에서는 합격이 됐을 때만 기분이 좋다는 말이다. 암튼 나도 이러한 탈락 문자를 참 많이 받아봤었기 때문에 예전 생각이 많이 났다. 젊었을 때는 뭐든 소중한 경험이라고 하지만 사실 힘들고 어려운 건 최대한 피해도 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피할 수 없을 때만이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 위로를 받는 게 좋다.

어느 회사에 수습이자 인턴으로 합격을 했을 때 일이다. 3개월인가 6개월인가의 기간이 지나고 나면 정직원으로 전환시켜 준다는 회사의 설명이 있었다. 서류, 필기, 실기, 면접을 거쳐서 최종 11~12명에 뽑혔다. 나름 이름이 있는 회사여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 기간 동안 정말 열심히 했다. 밤늦게, 새벽 일찍 출근하는 일도 잦았지만 뭔가 내가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더 차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20대였던 내게 그만큼의 여유가 없었고, 부푼 마음으로 잘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다.​​

문제는 조금 지나자 발생했다. 회사에서 여러 여건 상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수습(인턴) 직원들을 뽑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정상 10명 정도만이 정직원으로 전환 가능하다고 했다. 2명의 탈락. 그때부터 우리는 정말 소위 멘붕이었다. 당시에 뽑혔던 동기의 장을 맡았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친하게 지낸 동기들과 보이지 않게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고 무엇보다 애초 공고에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친구들은 모두 합격이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방침이 바뀐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 회사 때문에 놓친 다른 회사의 기회들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우린 함께 하기로 했다. 끝까지 지금 하는 일에 열심히 임하고 그 이후에 탈락 문자가 왔을 때 모두의 합격이 아니면 모두가 그만두자고 합의를 봤다. 즉 단체행동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무지의 장막'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모두들 누가 탈락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가 제안했는지 모를 이 제안에 한마음으로 의견이 일치했다. 동료애라는 게 뿜뿜 솟아났고, 경쟁보단 협력을 하며 수습 생활을 해 나갔다. 업무가 끝나면 같이 한잔하면서 재밌게 얘기하고, 또 최종 결과 발표가 오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최종 합격의 날이라고 해야 할지, 탈락의 날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날이 찾아왔다. 저녁 7시 정도에 발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린 회사 근처 카페에 다 같이 모였다. 웃으면서 이야기는 했지만 긴장감은 역력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문자가 도착했다. '탈락'. 나는 그 2명 중에 1명이었다. 솔직히 나는 동기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탈락자에서 제외될 거라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합격자가 된다고 해도 의리라는 것을 함께하고 불합리한 것에 반대하고 싶어 단체행동에 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 2개의 탈락 문자 중 하나를 받은 것이다.

다들 침묵에 빠졌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분명 함께 하자고 했던 동기들이 누구 하나 입을 떼지 않았다. 이제 회사에 가서 다 같이 합격이 아니면 우리 모두 탈락시켜 달라고 이야기하기로 한 시간인데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탈락한 2명이 함께하자고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합격한 10명은 그저 눈치만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신감이 매우 컸다. 사람이 싫어질 정도였다. 결국 내가 먼저 그냥 이렇게 마무리하자며 침묵을 깼다. 또 다른 탈락자 형은 그런 말을 한 나를 원망하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얼굴만 숙이고 있었다. 중요한 건 아무도 그건 약속과 다르다며 나를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침묵 속 동의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합격 문자를 받았으면 과연 그랬을까를 생각해 본다. 지금의 '나'는 이러한 경험에 찌들었기에 100% 함께 했을 것이라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분명 같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라고 해도 마음을 바꾸느니 애초에 그런 약속을 안 했을 것 같다. 그냥 어쩔 수 없으니 각자 열심히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처음부터 다른 의견을 냈을 것이다. 일단 같이하기로 하고 나중에 마음을 돌리는 행동은 도저히 내 스타일은 아니다.

'탈락 문자'. 사실 그 회사에서 온 탈락 문자는 내가 받았던 수많은 그저 그런 문자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그 일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그로 인해 나는 전혀 다른 직군의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다. 지금 삶도 충분히 만족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 일이 내 기억에 이렇게 쓴맛으로 남아있는 것은 역시나 그 탈락 문자보다는 내 인생에서 탈락된 그 회사 동기들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우연히 그 회사 동기 중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는 꽤나 연차가 쌓여 여유가 있어 보였다. 회사를 떠난 후 바빠서인지, 미안해서인지,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나에게 그들은 연락 한 번 없었다.  그들로 인해 힘들었던 나를 알기는 할까. 인생사가 다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때부터 확실해진 게 있다. 단선아, 내가 행복해야 주변도 행복하게 되는 거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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