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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선 Jan 20. 2024

삽질

"너희들 말이야, 인생에 삽질이란 없는 거다. 인생은 부채꼴이거든. 니들 지금은 이 자리에 같이 앉아있지만 무엇을 했는지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부채를 쫙 폈을 때처럼 서로 엄청 다른 곳에 위치해 있을 거야."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한 말씀이다. 사실 저렇게 디테일한 문장까지는 내가 각색한 것이고 '삽질과 부채꼴'과 관련하여 이런 뉘앙스의 말을 하셨던 것은 확실하다. 벌써 20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내 머릿속에 특히 '삽질'이라는 단어가 강하게 자리 잡은 이유는 뭘까.


처음부터 이 단어가 내 머릿속에 남았던 것은 아닌 거 같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 들었을 때는 큰 의미부여를 하지 못하고 흘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20대 후반에 취업준비를 하고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삽질'이라는 말이 기억났다. 참 신기하지, 그전에도 기억 깊숙이에는 있었을 텐데 불현듯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때서야 떠오른 것이다. 아무래도 취업 때 자기소개서라는 것이 회사에 합격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반성(?)과 자아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써야 했다. 자기소개서의 커다란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학창 시절 내가 해왔던 것을 최대란 '박박' 긁어모아야 했다. 그리고 당시 사회 초년생이 되기 위한 내가 가지고 있던 취업 관련된 경력은 학부생활과 알바밖에 없었다.


알바. 나름 참 많이 해봤다. 야간 편의점, PC방, 아파트 청소, 막노동 보조, 방판, 과외, 행정보조 등 방학 때만 되면 알바 사이트를 뒤졌다. 몸이 힘들다는 알바도, 몸이 편한 알바도 다 해본 것 같다. 하루에 주간, 야간 두 탕을 뛴 적도 있었다. 단기 알바를 찾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조건이 조금 안 좋거나 집에서 멀어도 붙잡았다. 송파에 살았는데 야간 편의점은 강남역, 주간 PC방은 명동에서 했었다. 주간 끝나고 바로 야간 알바로 뛰어가고 다시 명동을 가기 위해서는 하루에 집에서 2~3시간 밖에 잘 수가 없었다. 알바하러 가는데 지하철에 자리가 없어 의자 앞에 서 있다가 깜박 졸아 앞사람에게 고꾸라진 적도 있었다.

친구들에게는 말 못 했다. 한 번은 대학 동기들이 MT를 간다고 했고 나도 가고는 싶었으나 MT비용이 아까웠는지, 부담됐는지 그랬다. 그래서 며칠째 결정을 못했는데 그때 총무였던 친구가 동기 중에 한 명이 안 가게 됐으니 그냥 오라고 했다. 정말 그래도 되냐고 물었고, 가고 싶은 마음에 알겠다며 그렇게 MT를 다녀왔던 적도 있다. 나름 궁상맞거나 청승맞은 시기이고 이렇게 써 놓으니 되게 어려웠던 시절 같지만 소위 '눈물 젖은 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절대 아니 이러한 알바 생활도 몇 년 남짓 기간밖에 안 된다. 하지만 자기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것처럼, 당시 내겐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그 경험 덕분인지 회사 원서의 서류는 잘 통과되었던 것 같다. 그 나이 또래 중에서는 그래도 나름 힘듦 겪었다는 게 어필이 된 것이다. 자기소개서에 쓸 내용이 없다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는 여러 알바를 통해 여러 사람을 만나서인지 그럭저럭 솔직한 내 얘기를 써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현재는 전공과는 무관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전공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게 팀장님께서 나에게 글 잘 쓰고 말 잘한다고 가끔 칭찬해 주신다. 그럴 때마다 그런 능력이 하늘에서 툭하고 떨어졌을 리는 만무하고 신방과에서 배운 것, 지금 일하는 곳에서 직접적으로 적용할 업무는 없으나, 알게 모르게 하는 일에 조금은 녹아 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삽질.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있은 지금을 보며 가끔 학부 시절의 전공이 다른 거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해본다. 또 굳이 알바를 하루에 2개씩 했을 경험이 내 인생에 필요했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역시나 지금도 그 결론에는 변함은 없는 거 같다. 즉, 굳이 어려운 시기와 힘든 시기는 자청해서 경험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또 기왕이면 현재 직업과 관련된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그러나 피할 수 없으면 즐기기까지는 못하더라도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위로와 합리화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실제로 살아보니 인생에 삽질은 없다는 것을 느낀다. 이건 말로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고 살아봐야 알게 되는 것 같다. 고2 때의 담임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나이가 들수록 희미해지지 않고 더 명확해지는 이유일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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