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소녀 가수에서 완성형 싱어송라이터로
왼쪽부터 권진아 정규 3집 [The Dreamest] (2025), 미니 앨범 [The Flag] (2023), 싱글 [pink!] (2022), 정규 2집 [나의 모양] (2019), 미니 앨범 [우리의 방식] (2021), 정규 1집 [웃긴 밤] (2016)이다. 권진아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던 SBS K팝스타 시즌3(이하 K팝스타3)에서 대중들에게 첫 선을 보인 바 있다.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 K팝스타3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유희열의 안테나뮤직과 계약하며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앨범'이 아닌 '음원(싱글)'으로 승부를 보는 이 시대에, 권진아는 독특하게도 정규 1집으로 데뷔하였다. 정규 앨범치고는 8트랙으로 곡 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질의 곡들을 야무지게 담아내어 성공적인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특히 타이틀곡인 '끝'은 3박자의 애절한 발라드로 권진아가 가진 보컬리스트로서의 매력을 오롯이 담아냈다.
권진아는 K팝스타3에서부터 기타 한 대를 가지고 R&B, 모던 록, 팝 발라드까지 아우르며 장르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음악성을 자랑했다. 성대 접촉이 단단한 편은 아니라서 호흡이 적절하게 섞인 소리를 구사하는데도 허스키하지 않고 모든 음역대에서 그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 권진아가 가진 이러한 기량은 K팝스타3때부터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아니 지금은 오히려 훨씬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처음 그녀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봤을 때도 생각했다. '어떻게 저렇게 노래를 안정적으로 하지?' 보통 사람이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극한의 상황에 놓이면 조금이라도 긴장이라는 걸 하게 마련이다. 다들 알다시피 몸이 긴장하면 호흡이 평소보다 훨씬 짧고 얕아진다. 그런 상황에서도 권진아는 마치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듯이 안정적인 라이브를 선보인다. 라이브임에도 불구하고 스튜디오 음원을 듣는 것 같은 안정감을 낸다는 것은 그만큼 발성에 대한 이해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여기서의 이해라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이 이해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흔히 말하는 '머슬 메모리(mustle memory)' 같은 것이다.).
보컬리스트 권진아로서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음악 얘기를 해 보자. 앞서 정규 1집에 관해서는 간단하게 짚었으니 넘어가고, 그 사이에 다수의 싱글과 OST 음원들을 발표하기도 하며 대중들에게 보컬리스트 권진아로서의 성장 스토리를 계속해서 써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포텐이 터진 건 2019년, 정규 2집 [나의 모양]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나의 모양]은 권진아의 음악 인생 2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이 앨범의 킥은 첫 트랙인 '운이 좋았지'이다. 처음에는 2번 트랙인 '시계 바늘'로 타이틀곡을 정했다가 '운이 좋았지'의 반응이 너무 좋아 본의 아니게 더블 타이틀로 급하게 바꾸었을 정도이다. 노랫말을 잠깐 보면서 이야기해 보자.
'나는 운이 좋았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어려운 이별을 한다는데. 나는 운이 좋았지.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있던 사랑을 했으니까.'
'운이 좋았지'의 도입부 가사이다. 그저 피아노 반주 위에 세상 담담한 목소리로 세상 쿨한 이별을 노래하는 권진아의 목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억지 감성으로 쥐어짜지 않아도, 너 없인 안 된다며 울고불고 난리치지 않아도 오히려 찌르르 하고 가슴을 아프게 하는 느낌이 더 슬프다. 오죽하면 또 다른 걸출한 보컬리스트인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제아'가 이 곡을 듣고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여자 미친 여자네...'
표현이 과격하긴 하지만, 저만큼 이 곡을 잘 설명해 주는 말도 없을 것 같다. 제아가 말한 '이 여자'가 가리키는 대상은 당연히 중의적이다. 가사를 쓴 권진아 본인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고, 노래 속 화자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로든 미친 건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이별을 그려낼 수 있는지 아티스트 권진아로서 미친 것도 맞고, 그 폭풍 같은 이별 속에서 '나는 운이 좋았지'라며 스스로 위안 삼으며 고요히 침잠하려는 화자가 미쳤다는 것도 맞는 이야기이다.
이 곡이 비단 제아만의 마음을 울린 건 아닐 것이다. 앨범의 첫 트랙에 이 곡이 실렸다는 것도 신의 한 수이다. 사람들은 '어라? 권진아 앨범 나왔네. 한 번 들어 볼까?'하고 무심코 재생했다가 '운이 좋았지'를 얼떨결에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각자의 이별을 떠올리고 모두들 조용히 읊조릴 것이다. '이 여자 미쳤네...' 오히려 뒤에 타이틀곡이랍시고 이어지는 '시계 바늘'은 좋은 곡임에도 불구하고 힘을 잃어버린다. '운이 좋았지'가 그만큼 힘이 센 곡이다.
아무튼 2집 [나의 모양]은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권진아는 그저 노래 잘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소녀 가수가 아닌, 뛰어난 앨범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아티스트', '싱어송라이터'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의 행보는 계속해서 성공적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성과는 2021년에 발표했던 미니 앨범 [우리의 방식]인데, 모든 곡을 권진아 본인이 만듦으로써 완성형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해 냈다.
올해는 정규 3집 [The Dreamest]를 발표하며 여전히 그녀만의 성장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는데, 언젠가 또 한 번 '운이 좋았지' 같은 결정적인 킥을 한 방 날려줄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흐뭇한 미소로 그녀의 행보를 지켜보고 응원해 준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