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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와 숫자들

단편소설집을 읽는 듯한 소담스러운 음악

by Charles Walker
스크린샷 2025-09-24 084312.png 9와 숫자들 정규 3집 [수렴과 발산] (2016, 왼쪽), 정규 4집 ['19 서울시 여러분] (2019, 오른쪽)


이들의 음악도 결코 화려하다고는 볼 수 없다. 모던 록 밴드 '9와 숫자들'을 이야기하려면 이들의 노랫말을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이들은 탁월한 가창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화려한 연주도 없이 오로지 '이야기' 하나로 엄청난 음악적 성취를 보여주는 밴드이다. 가사를 잘 쓰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좋은 음악이 탄생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좋은 가사는 좋은 음악이 되기 위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먼저 2016년에 발표된 정규 3집 [수렴과 발산]을 들어보자. 가만히 눈을 감고 첫 곡 '안개도시'를 듣고 있노라면 안개 낀 도시 속에서 창문을 열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조용히 미소짓는 어느 누군가가 떠오른다. 어딘가 콜드플레이(Coldplay)를 연상케 하는 연주와 세상 담담하게 오로지 '가사'를 전달하는 데에만 집중하려는 사려 깊은 보컬도 너무나 인상적이다.


압권은 다음 곡 '언니'이다. 세상 잘난 언니를 가진 여동생이라면 반드시 공감할 수밖에 없는 노랫말을 남자 보컬이 부르는 게 기묘하게 느껴지면서도 위화감이 전혀 없다. 오히려 여자 목소리로 이 곡을 듣는다면 필요 이상으로 '센 노래'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노랫말 어떤가. '이런 말은 미안해. 언닐 좋아하지만 언제까지나 언니의 그늘에 갇혀 있을 수는 없어'. 또 이런 말은 어떤가. '사람들이 언니만 예뻐하고 언니만 한 동생 없다고 할 때엔 눈물을 훔치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그 말은 사실이니까. 내게도 자랑스럽기만 한 내 언니니까.' 언니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잘난 누군가의 동생'이 아닌 '나'로서 오롯이 서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상황을 이만큼 잘 포착해 그려낼 수 있을까.


그 밖에도 몽글몽글한 연주와 꿈을 갖고 싱가포르에서 우리나라로 온 유학생을 소개하는 노래 '싱가포르', 같은 학교를 몇 년을 다녀도 다른 수업을 들었기에 여전히 어색한 대학 친구와의 관계성을 노래한 '다른 수업' 같은 노래를 추천해 본다. 아니, 사실 전곡이 다 추천 대상이다. 숨은 명반으로 워낙 정평이 나 있기에...


그로부터 3년 후, 2019년이 되어서 이들은 정규 4집 ['19 서울시 여러분]을 발표하는데, 특이하게도 첫 번째 트랙 제목이 '서울시'이고, 마지막 트랙 제목은 '여러분'이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여러분'은 윤복희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9와 숫자들과 '여러분'... 언뜻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조합이다. '여러분'은 무려 대가수 '윤복희'의 원곡이며 임재범, 소향, 알리 등 소위 말하는 '대형가수'들만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소화하기 아주 어려운 곡이다. 하지만 9와 숫자들은 곡의 위압감에 주눅들지 않았다. 그냥 자기 스타일대로 무심하게 소화해 냈다. 나는 그것만으로 이들의 내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3집보다 4집을 먼저 듣고 이들에게 이미 반한 상태였다. 3집의 노랫말도 좋지만, 4집에는 슬며시 웃음짓게 만드는 재미있는 노랫말이 참 많았다. 특히 흐뭇하게 웃으면서 들었던 곡은 '주부가요'였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이름을 지운 채 가정에 충실하며 살다가 라디오 주부가요 대전에 참가하면서 '내가 누구냐 상계동 노사연이다'라며 주부가왕을 노리는 이야기이다. 요즘엔 아내 혹은 엄마를 전기밥솥, 청소기, 식기세척기 취급하는 분위기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부정하지 말자. 이건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서이다. 세대 교체와 함께 가장 시급하게 정착되어야 할 인식이 바로 이것이다. 가사 일을 여성에게만 전가하지 않는 일. 가사 일은 가족 모두의 일이다. 그 당연한 진리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지 않을까.


좋아하는 밴드를 소개하다 보니 지면이 상당히 길어진 것 같다. 슬슬 마무리를 해야겠지... 일단 무엇보다도 9와 숫자들의 노래들은 허황되지 않아서 좋다. 현실을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다. 꽃길 같은 미래를 꿈꾸지도 않고,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허우적대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보컬의 목소리는 너무나 담백하다. 마치 언어의 메신저처럼, 어느 낭독회에 초대된 낭독자처럼 명료한 발음으로 말하듯 노래하는 보컬이 우리에게 많은 걸 시사한다. 특히 음악을, 노래를 해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 보컬의 노래를 참고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군더더기를 다 빼고. 오로지 말 속에 담긴 감정으로만 담담하게 부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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