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나누는 온정의 문화
폴란드에 살면서 김치가 없어도 식생활에 크게 문제를 느끼지 않는 이유가 있다.
바로 폴란드의 식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각종 절임류 덕분이다.
물론 깊은 맛이나 향의 기준으로으로 치자면 김치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식사 때마다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김치와 같이 발효식품 특유의 상큼하고 신 맛에 한번 먹으면 계속 당기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또 어느 메뉴에나 함께 내놓아도 그럭저럭 잘 어울린다.
아마도 폴란드는 각종 절임류의 천국이 아닌가 싶다.
오이나 양배추 이외에도 버섯, 사탕무, 토마토, 마늘, 당근, 콜라비, 콜리 플라워 등 폴란드에서는 내가 아는 모든 야채들을 절임을 해서 담가 먹는다. 심지어는 사과나 레몬, 자두, 딸기 등의 과일류도 절임류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청어 같은 생선 절임 종류도 어마어마하다. 지방에 따라서는 고기를 절이기도 한다.
절임 방식도 다양한데 한국의 짠지 같은 소금 절임이 많고 초절임, 당절임 등도 있다.
특히 오이절임과 양배추 절임은 폴란드에서 가장 대중적인 절임식품들이다. 폴란드 요리에서 빠질 수 없는 반찬이기도 하고, 비고스 (Bigos), 피에로기 (Pierogi), 양배추 수프(Kapuśniak), 와장키 (Łazanki), 팬케익 등 각종 요리의 밑재료로도 쓰이기도 한다.
양배추 절임은 김치가 떨어졌을 때 나에게 김치 대체역할을 해주는 음식이다.
고추장과 된장을 푼 물에 폴란드 양배추 절임과 고기나 소시지를 넣어 끓이면 폴란드식 찌개도 된다. 나름 괜찮은 맛이라 자주 요리해서 먹는다.
폴란드에 이렇게 절임류가 많은 이유에는 기후 특성이 크게 차지한다.
폴란드는 냉대 습윤 기후의 영향으로 1년의 절반 정도가 햇빛이 거의 들지 않고, 춥고 서늘한 시기가 비교적 길다. 가을과 겨울에는 아무래도 신선한 야채나 과일 확보가 제한되고 가격도 많이 비싸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폴란드인에게 절임류는 비타민 섭취가 부족해지는 계절을 버티게 해주는 고마운 음식이다. 김치를 만들어낸 우리 조상처럼, 환경조건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한 옛 폴란드 조상들의 생활 속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폴란드도 대가족이 한집에서 함께 살았다.
가을부터 겨울 내내, 그다음 해 여름까지 온 가족이 먹을 중요한 식량 중의 하나였으므로 담가야 하는 절임음식의 양이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주로 나무로 만든 배럴에 담그거나 한국과 같은 장독대에 담기도 하였다.
배럴의 경우 그 높이가 2미터나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품앗이의 형태로 동네 사람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다 같이 양배추 절임 작업을 거들었다고 한다.
밭일이 끝난 저녁 무렵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양배추 절임을 담그면서, 노동의 피로를 잊은 채 새벽까지 서로 신나게 이야기하고 노래와 춤을 추는 등…
이렇게 절임 작업은 이웃과의 나눔의 정을 주고받는 공동체 문화로서, 즐거운 동네 연중행사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폴란드도 도시화, 산업화에 따른 핵가족으로의 변화로 이러한 풍경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집에서 만들지 않고도 웬만한 모든 절임류는 병에 든 제품으로 가게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오이절임이나 양배추 절임과 같이 기본 절임류는 아직도 집에서 직접 담가 먹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최근 코로나 팬데믹을 겪는 동안, 절임류에 함유된 유산균이 면역력을 높이는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절인 음식들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건강에 대해 관심도가 높은 젊은 층들 사이에서도 간단한 절임 레시피에 대한 인기가 많아지고 있다.
오이나 양배추 수확 시즌이 되면 지금도 집집마다 야채를 잔뜩 사고 절임 채비 작업을 한다.
내가 사는 집 근처에 매주 주말마다 여는 농산물 장터가 있는데, 여기서 농부들이 모여 직접 재배한 야채와 과일을 판매한다. 절임을 담그는 시즌 즈음이 되면 이곳에서 싱싱한 야채를 사려는 많은 인파로 진풍경을 이룬다.
직접 담근 절임류를 병에 담아 가족이나 주위 친지, 이웃들에게 나눠 주며 온정을 표시하기도 한다.
폴란드에서는 재활용 병에 담긴 절임류를 선물로 주고받는 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한 일이 아니다.
건네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의 마음도 즐거워지는 선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바쁜 시대에 살고 있는 만큼, 만든 사람의 정성과 온정이 느껴지는 선물이기에, 더더욱 그 선물이 값지다.
마침 이웃집 아주머니가 찾아와 자기가 직접 담근 오이절임 병을 선물로 주었다.
증조할머니,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레시피로 담근 오이절임,
출신 지역의 특색 있는 레시피와 소재로 만들었다는 오이절임…
같은 종류의 절임이라도 늘 맛과 향이 틀리다.
그래서 선물로 받은 절임류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절임에 대한 스토리, 선물을 준 그 사람에 대한 스토리로 우리 집의 식탁이 한층 활기가 넘친다.
예전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이웃과 함께하는 나눔의 정이 아직도 살아 있음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식생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폴란드의 절임문화가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올해는 나도 직접 과일잼을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나눠주려고 한다.
잼이 담긴 병을 받고 기뻐하는 이웃과 지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벌써 즐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