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객의, 투어객에 의한, 투어객을 위한
글렌피딕 투어는 다행히도(?) 홈페이지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럼에도 예약은 전화를 해야 한다.)
1. EXPLORERS TOUR 기본 투어, 1시간 30분, 글렌피딕 시그니처 3가지 시음(12y,15y,18y)
2. SPIRIT OF INNOVATION TOUR 내가 한 투어, 2시간, 글렌피딕 시그니처 5가지 시음 + warehouse 1,8 방문
3. GLENFIDDICH SOLERA: DECONSTRUCTED 2번째 방문한다면 추천투어, 2시간 30분, 글렌피딕 특징들을 경험할 수 있음 (그림이나 글로 이해하기 어려운 Solera process를 경험하고, 몰트 마스터 직업 체험도 가능)
4. PIONEERS TOUR 시간이 된다면 추천투어, 4시간, 오크통에서 직접 병에 담아 올 수도 있고 음식 페어링 시음이 가능
SPIRIT OF INNOVATION TOUR를 시작한다. 가장 먼저 글렌피딕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는다. 가장 대중적으로 거대한 증류소지만, 실제로는 아직까지도 어느 대기업에도 인수되지 않고 '가족' 경영을 5대손 째 하고 있는 전통적인 증류소이다. 아이러니함까지 멋있달까.
증류소 곳곳을 걸어 다니면서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된다. 증류소 내부는 증류소마다 사진 촬영이 허가되는 구역이 다르다. 위스키가 만들어지는 기본적인 방식은 동일하기 때문에 투어 순서는 거의 비슷하다.
가장 처음 단계인 보리를 발아시키고 건조하는 과정은 효율성 측면에서 증류소에서 직접 전통적인 방식으로 손수 사람이 진행하는 경우는 드물고 (발베니, 보모어, 라프로익, 커호만, 하이랜드파크, 스프링뱅크는 아직도 사람의 노동력을 사용하여 진행한다.) 대부분 대량 생산된 몰트를 사 오기 때문에, 이미 발아된 보리/건조된 보리/분쇄된 보리를 통에 담아 보여주는 것부터 보통 투어가 시작된다. 물론 보리를 건조할 때 특정 향을 입히거나, 다른 종류의 보리를 사용하는 등 몰팅 과정에서도 증류소의 특징이 드러날 수 있지만, 피트 위스키를 만들기 위한 건조된 보리에서 피트 향을 맡은 적 말고는 증류소마다의 특징을 육감으로 구별하긴 쉽지 않았다.
투어객들의 호기심이 증폭되는 구간은 매쉬툰들을 맞이할 때부터이다. 매쉬툰 안에서 분쇄된 보리들을 뜨거운 물과 섞으면, 보리 속 효소들이 다시 깨어나 당을 만들어 낸다. 매쉬툰 크기도 어마어마 하지만(1~15톤), 공간에서 나는 특유의 고소한 냄새도 흥미롭다. 매쉬툰의 소재도 증류소마다 나무 혹은 금속 중 선택하는데, 나무 매쉬툰은 시간이 오래되면 까맣게 변해 있어서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 진다. 인공 첨가물 없이 나무, 물, 보리가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반응하면서 변한 모습이라 마치 노송을 보는 기분이다.
바로 이어지는 워시백 공간 또한 매쉬툰 공간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발효과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인데, 워시백도 나무 혹은 금속 중 증류소 특징에 맞게 다르게 만들어진다. 여기까지는 맥주를 만드는 과정과도 유사하고, 맥주 수준의 알코올이 만들어진다. 시음을 하게 해주는 증류소도 있는데 일반적인 맥주보다는 훨씬 신맛이 난다.
그리고 가장 증류소마다의 특징이 드러나는 증류 공간이다. 증류기의 모양에 따라 위스키의 향과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글렌피딕 증류소의 증류기는 평균보다 짧고 뚱뚱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석탄으로 증류기를 돌리고 있었다. 증류기에서 증류되어 나온 위스키는 80도 정도의 고 알코올이고, 오크통에서 숙성과정을 거쳐도 50도가 넘는다. 시중에 병입 되어 있는 위스키는 물을 첨가한 것이 대부분인데 (40도 정도) 글렌피딕은 병입을 자체적으로 진행해서 알코올 도수를 맞추기 위해 첨가하는 물로 로비듀 물을 사용한다. 이런 세심한 배려들이 너무 매력적이다.
내가 증류소 투어 중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warehouse를 갈 때이다. 증류소마다 여러 개의 웨어하우스를 가지고 있고, 투어객에게 공개하는 웨어하우스는 대부분 1-2개 정도이다. 가치를 형언할 수 없는 위스키가 오크통에서 잠자고 있는 공간. 지구 상에 어느 공간도 이런 느낌을 재현하지 못할 것이다. 갓 넣어진 새 오크통부터 몇십 년 동안 보관되어 색이 변한 오크통들이 층층이 쌓여있는 장관. 살짝 서늘한 온도와 쾌적한 습도. 바닥에 밝히는 모래의 촉감. 오크통에서 자연스럽게 증발되어 공기 어딘가에서 천사처럼 존재하는 위스키의 냄새. (오크통에 가득 위스키를 넣어 몇 년을 숙성시킨 뒤 열어보면, 30% 이상이 증발된다. Angel`s share라고 이 현상을 부른다.)
드디어 위스키를 마실 시간이다. 총 5개의 위스키를 시음해 볼 수 있었다.
글렌피딕 12년, 글렌피딕 IPA, 글렌피딕 15년, 글렌피딕 프로젝트 XX, 글렌피딕 21년 RUM cask Finish. 글렌피딕 12년은 아메리칸 오크 버번 캐스크와 유러피안 오크 쉐리 캐스크에서 숙성된 가장 시그니처 라인이고, 40% 알코올 도수로 그리 높지 않아서 더 쉽게 느껴진다. 글렌피딕 15년은 '솔레라 시스템'으로 아메리칸 오크 버번 캐스크 숙성원액, 유러피안 오크 쉐리 캐스크 숙성원액, 그리고 아메리칸 오크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된 위스키를 새 아메리칸 오크에 짧게 숙성시킨 원액 총 3가지를 섞은 위스키이다. 섞을 때 'Solera vat'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35,000리터)의 오크통에 몇 개월 정도 넣는데, Solera vat 안에는 늘 1/3 정도의 위스키가 남아있을 정도만 오크통에서 위스키를 꺼내어 병입 한다. 1998년 이후로 한 번도 이 오크통은 비워진 적이 없다고 한다. 모든 병에서 일정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글렌피딕 IPA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IPA 맥주가 담겼던 오크통에 위스키를 피니시 숙성시킨다. 스페이사이드의 유명안 브루어와 콜라보한 재미있는 위스키이다. 글렌피딕 프로젝트 XX도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데, 20명의 위스키 전문가들이 각자 좋아하는 원액을 섞어서 만들어 보았는데, 각각의 특징도 살면서 조화로운 맛이 나서 생산하게 되었다고 한다. 글렌피딕 21년 RUM cask Finish는 21년 동안 숙성된 글렌피딕을 마지막에 Caribbean rum cask에 피니시 숙성을 시킨다. "Raised in Scotland. Roused by the Caribbean." 글렌피딕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설명이 멋있다.
투어가 모두 끝난 뒤, 피날레처럼 글렌피딕은 역시나 투어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안다. 오크통에서 직접 내 손으로 위스키를 병입 하고, 라벨도 적어서 부착한 뒤, 묵직한 나무 케이스 안에 넣어 가져 갈 수 있다. 병입을 직접 하는 증류소여서 가능한 건지 모르겠지만, 12파운드를 내고 직접 병입한 글렌피딕 15 CS를 가져갈 수 있다면 지나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병입이 가능한 증류소는 방문했던 13개 증류소 중 글렌피딕 외에 글렌드로냑 밖에 보지 못했다.)
글렌피딕 레스토랑도 훌륭하다. 글렌피딕과 발베니 위스키를 모두 먹어볼 수 있고, 특히 글렌피딕 희귀 바틀을 잔으로도 즐길 수 있다. 가격은 물론 아주 저렴하진 않지만, 한국 위스키 바에서의 가격을 생각하면 너무 싸게 느껴져서 조심해야 한다. 영국(스코틀랜드) 음식이 맛이 없다고들 하는데, 돌아다녀본 결과 증류소와 호텔 레스토랑의 음식들은 아주 입에 잘 맞았다. 증류소가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매우 드물기 때문에, 방문한 증류소에 레스토랑이 있다면, 100% 무조건 식사를 하고 가길 추천한다.
솔레라시스템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영상이라고 생각되어 퍼왔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ftfcQ_uIWz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