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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Mar 28. 2024

우리 여기 5시간 동안 있었어..?

비숍 박물관 2

  조명과 레이저가 다양한 도구와 만나며 생기는 현상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장은 어두컴컴하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미션 임파서블처럼 레이저 빔을 피해 탈출하는 그리 크지 않은 부스가 덩그러니 있다. 승부욕으로 R을 이겨보겠다고 이 악물고 레이저 빔에 닿지 않으려 바닥을 기고 유연하지도 않은 몸을 이상하게 베베 꼬아 탈출 성공 후, 성공하지 못한 R을 얄밉게 놀려본다.

  넌 최선을 다했다며 결국 성공하지 못한 R을 여유롭게 다독인 후 다음 체험 부스를 돌아보는데 과학에 관심 있는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체험장이 되겠다는 생각과 몹시 오래되어 보이는 체험 도구들과 심심찮게 고장 난 듯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버튼 및 관리되지 않은 도구들 때문에 제대로 된 체험을 할 수 없어 일찌감치 전시장을 나선다.


  출구 문을 열고 나오니 어두운 전시장 덕분인지 풍경은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R의 손을 잡고 단체 관람 온 아이들이 줄지어 서있던 마지막 전시장으로 느긋하게 걷는다.


  '우와 이게 뭐야!?'

  얘야 너도 자연사 박물관 같은 거 중학교 여름방학 때 숙제로 다녀보지 않았니. 몇 시간 동안 이곳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오랜 시간 많은 것들을 한 번에 관람하느라 지친 눈은 다시금 새로워져 반짝인다. 아이처럼 신나 버려도 과하다 오해받을 일 없는 사랑하는 R의 옆에서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히 들떠도 돼.

  여러 섬으로 이뤄진 하와이의 각각의 섬 해변에서 채취한 다른 종류의 모래와 해변에 대해 설명하는 둥근 테이블 뒤로 작은 인공 폭포의 떨어지는 물소리로 귀가 트인다.

  하와이 모든 섬의 생태계를 다루는 이 전시장은 하와이 토종 동식물 곤충의 표본과 해양생물, 화산활동 그리고 생태계 교란 외래종을 아이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하도록 모든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했다. 특히 화산 모형 안을 굴처럼 만들어 웅크리고 걸어 다니며 용암 속에 갇힌 곤충 표본을 관찰하는 동안 활동하는 화산 소리도 생생히 들을 수 있는 게 너무 흥미로웠다. 때론 더욱 거친 소리를 내는 화산 모형이었는데 전시장 위층을 올라가니 궁금증이 풀렸다. 마치 용암이 끓는 것처럼 재현해 놓은 화산 모형 꼭대기가 보이고 관람객들이 모형 화산 버튼을 누르면 화산의 상태별로 달라지는 용암을 볼 수 있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달라지는 용암을 보고 들으며 얼마나 그 앞에 서있었는지 아직 끝나지 않은 관람을 문득 떠올리며 발걸음을 서둘러본다.

  이놈의 바퀴벌레 외래종 녀석. 그렇지 너도 배 타고 오래전 들어온 이방인들과 함께 하와이에 왔구나. 하와이 토종 곤충과 외래종 곤충의 코스튬을 착용해 볼 수 있는 귀여운 체험장을 지나 1층으로 내려와 뜬금없이 있는 보드게임을 R과 함께 해본다. 보아하니 하와이에서 서식하는 동식물을 배울 수 있도록 만든 학습용 보드게임 같았지만 R을 이기는 것 말곤 관심이 없는 나에겐 여느 보드게임과 다를 바 없다.

  음.. 사실 이기는 것에 관심은 없지만 승부욕이 강한 R을 이긴 후 놀리면 R의 반응이 너무 귀여워 그걸 보고 싶어 이기려 한다.

  R의 귀여운 반응을 두 번이나 봤으니 행복한 하루라 말할 수 있지.


  놀이공원처럼 놀이기구에서 내린 후 출구가 기념품 가게와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소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구조와 같이 비숍 박물관도 기념품 가게를 통해 출입한다. 하와이의 상징적인 동물인 거북이는 말할 것 없고 귀여운 닭과 돼지 인형이 여러 곳에 걸쳐 판매되고 있는데, 애니메이션 영화 '모아나'에서 모아나가 키우는 반려동물로 닭과 돼지가 그저 무작위로 설정한 동물이 아니란 비숍 박물관을 관람 후 알았다. 하와이 원주민들의 대표적인 가축이었돼지와 닭은 이들의 삶에 여러모로 비중 있는 역사가 있는 거다.


  귀여운 기념품을 사고 싶어 한참을 여기저기 둘러보다 늘 그렇듯 하와이 느낌 물씬 나는 엽서 한 장을 계산하고 드디어 문 열고 밖을 나섰을 땐 이상한 시간 여행을 마친 후 현실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 문 하나를 두고 말이지.


  '우리 여기 5시간 동안 있었어!?'

  2시간 관람을 예상했던 나의 오만함을 겸손하게 만든 비숍 박물관.

  하와이 왕족 카메하메하의 마지막 후손인 버니스 파우아히 비숍 공주의 남편인 미국인 찰리 리드 비숍이 아내 버니스 비숍 공주를 기리기 위해 1889년에 설립되었고, 이곳은 1940년 대까지 교육시설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숍 박물관에는 폴리네시안의 역사뿐만 아니라 하와이의 역사도 볼 수 있는데, 지금의 하와이엔 원주민보다 더 많은 아시안과 백인들이 살게 된 사건들도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백인 미국인들이 얼마나 졸렬하고 안하무인으로 하와이의 땅을 야금야금 사들이고 결국엔 침략하며 강제합병까지 한 자세한 기록은 다루진 않지만.

  R을 만나기 전까진 전혀 관심 없던 하와이를 처음 방문했을 때, 눈부신 알라 모아나 해변을 보고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살에 닿는 햇볕은 보석 수천수만 개를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거리잖아.

  이렇게 아름다운 하와이에 금사빠가 되어 하와이의 모든 것이 궁금해질 때 즈음, 태평양 한가운데 섬나라가 어쩌다 미국의 50번째 주가 됐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될 때 꼭 방문하고 싶었던 비숍 박물관. 하와이의 역사가 남의 일 같지 않아 좀.. 먹먹하다. 하와이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아름답겠지만 장소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쓰레기들을 볼 때면 원주민들이 바라던 웅장하고 아름다운 하와이의 미래가 이런 모습이길 바랐을까. 그들 앞에 침략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미래를 살고 있을까. 이런 의미 없는 질문을 머릿속에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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