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타피오카 푸딩. 따듯한.
12월 24일 그리고 12월 25일
'자기야, 자긴 무슨 옷 입으면 되지?'
12월이 되자마자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을 위해 예약한 태국식당을 가기 전 빨간색 니트 민소매에 빈티지 매장에서 산 흰 치마는 치수가 맞지 않아 널널해 얄상한 갈색 꽈배기 벨트를 차며 R에게 물어본다.
'아! 그거! 자기 초록색 티 있잖아!'
한참 코로나로 다른 나라로 여행하기 어렵던 21년은 R과 만날 수 없었다. 거의 1년 반을 만나지 못하고 영상통화와 카톡으로만 서로를 그리워하던 이땐 서로의 생일과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다른 해 보다 택배를 자주 주고받곤 했다. 다른 나라로의 출입국이 어려운 것에 더불어 우체국 국제택배의 일부 서비스도 무기한 정지되면서 값비싼 프리미엄 국제택배를 이용해야 했는데, 최대한 부피를 줄여 포장한 R의 생일선물로 고른 옷가지들을 하와이로 보내기 위해 6만 원이 넘는 택배비용을 지불했던 아찔한 기억을 불러오는 초록색 와플 티지만 R에게 너무 잘 어울리니 그걸로 됐다.
그렇게 빨강, 초록, 하얀색 옷으로 맞춰 입은 우린 한 쌍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어 4시 반쯤 집을 나선다. 차 막힘이 심한 하와이라 혹시 차가 많이 막힐 걸 대비해 일찌감치 집을 나섰는데 생각보다 막히지 않아 30분도 안되어 카일루아에 도착한 우리는 예약시간이 한참 남아 주변을 구경했다.
2019년 R을 만나러 하와이에 왔을 때 카일루아 해변에 가보고 싶어 시내버스를 타고 R과 함께 왔던 추억이 있는 카일루아에 도착한 순간 가물거리던 기억 가장자리에서 점점 선명해진 그날의 찰나가 마음을 간질인다.
가을에서 겨울을 지나갈 때면 기온차가 별로 없는 하와이라도 짧아진 해를 잡아둘 재간이 없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해 질 녘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나는 이미 사람들 정수리를 태울 듯 강렬하던 해가 얼굴 높이로 내려와 눈부셔 실눈을 뜨게 만들어도 곧 저물 해를 기다리며 R과 카일루아 시내 이곳저곳을 거니는 게 즐겁기만 하다. 빽빽한 빌딩의 호놀룰루의 도심과 다르게 낮은 건물들과 넓은 부지의 타운하우스가 있는 이곳은 미국 본토의 축소판 같아 미국의 작은 동네에 온 듯한데, 다양한 인종을 마주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호놀룰루와 달리 길거리를 걷는 사람이 대부분 백인인 것도 한 몫한다.
이미 늦은 오후기도 했고 크리스마스 이브라 대부분의 상점이 일찍 문을 닫아 여러 곳을 둘러보진 못했지만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지. 한국 소도시 어딘가의 작은 읍내처럼 아담한 카일루아 시내의 끝에서 태국식당 쪽으로 돌아가는 길, 빛바랜 파파존스 간판 뒤로 온통 초록의 산능선에 걸쳐 꼴딱 거리며 저물어가는 해를 보는 것만큼 황홀한 건 없을 테니까.
노르스름한 따듯함은 사라지고 쌀쌀한 공기가 돌 때까지 걸어도 겨우 저녁 6시. 예약 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았는데 어쩌지. R과 상의 끝에 식당에 들어가 한 시간 일찍 식사할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한다.
R이 군 전역 후 대학을 다니면서 방학 동안 잠깐 아르바이트했던 이 식당에서 언젠가 한 번 식사를 하자고 몇 번이고 말만 하다가 드디어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왔다. 주황색 조명등 아래 웃음을 머금고 대화하는 식당 안 이들의 얼굴엔 이번 한 해도 최선을 다한 삶을 자축하며 연말 분위기 한껏 담은 잔을 기울인다. 쥐뿔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 보인다.
식당 입구 정면에 있는 계산대엔 포장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붐벼대는 손님이 빠지길 식당 입구 앞에서 기다리던 R 뒤로 서양배 체형의 중년 백인 여성이 R의 뒤통수에 대고 'Excuse.' R이 문 옆으로 채 비켜나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어버린다.
두꺼운 배를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그녀의 힐이 연휴에도 쉼 없이 일해야 하는 게 불쌍하게 느껴질 때쯤, 그녀의 치켜든 턱은 입구 문 꼭대기에 닿을 만큼 정도가 없는 오만함으로 가득 찼다. 초록색 줄줄이 비엔나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백인 중년의 남성, 백인 십 대 여자아이들 4명은 외식 직전에 혼이라도 났는지 낯빛이 창백하다. 노을 덕분에 들뜬 마음을 무례한 중년의 백인 여성 때문에 폭삭 식는 걸 허락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의 뒤통수가 뚫리기 직전까지 노려보며 마음을 풀어본다.
얼마 되지 않아 포장 손님들이 빠지면서 직원에게 한 시간 정도 일찍 식사를 할 수 있는지 물었고 4인 이상되는 가족단위의 손님이 많았기 때문에 2인석은 여유가 있어 운 좋게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두 번째 분노에 휩싸일 위험에 처한 나는 차분히 R에게 이상한 상황을 설명한다. 장발을 한 젊은 백인 남자 직원은 우리에게 손바닥 반 만한 QR코드 종이 2개를 테이블에 올려놨지만 우리 뒤로 들어오는 2~3팀에겐 모두 메뉴판을 주는 게 아닌가. 우린 좋지 않은 화질의 사진들과 가격 및 메뉴 이름을 핸드폰으로 보느라 메뉴를 정하는데 상당히 불편했고 우리 테이블을 제외한 모든 테이블은 백인들 뿐인 상황을 봤을 때 마치 우린 아시안 음식점에서 아시안 차별을 받는 우스운 상황 같아 보였다.
불같은 내가 젊은 백인 남자에게 직접 물으면 좋게 물어보진 못할 것 같아 R에게 물어봐달라고 부탁했지만, R은 여러 기회들을 놓치곤 그 직원이 아닌 엉뚱한 아시아계 직원에게 메뉴판 상황에 대해 물어본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다른 직원은 당연히 모범적인 답변을 할 뿐이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성격이 다른 R이기도 하고 처음으로 같이 보내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망치고 싶지 않아 속으로 씩씩거리다 드디어 나온 파파야 샐러드를 한 입 먹고 개안하며 불쾌한 감정이 손쉽게도 상쇄된다. 쯧. 단순하다 단순해.
R이 일하면서 즐겨 먹었다던 닭가슴살 코코넛 커리도 함께 주문했다. 처음 먹어보는 태국식 커리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렇게 부드럽고 감칠맛이 폭발할 일인가. 팟타이까지 완벽하게 먹고 후식으로 포장주문 한 얇은 피에 쌓아 구운 바나나가 나올 때 R은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백인 여직원에게 여기에서 잠시 일했으며 혹시 사장님을 잠깐 볼 수 있는지 묻는다.
아쉽게도 사장님 부부는 어디에선가 연휴를 즐기느라 가게를 나오지 않았고 그들의 아들 딸이 식당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주방에서 요리 중인 사장 아들을 만나려고 기다렸지만, 손님이 나가자마자 새로운 손님이 계속 들어오며 주방은 미친 듯이 바빠서 결국 아들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주방과 홀을 왔다 갔다 하며 일하던 사장 딸이 R에게 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바쁜 상황이라 이마저도 그리 긴 대화가 되진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내온 바나나 타피오카 푸딩의 따듯함은 왠지 자신들을 찾아온 R에 대한 반가움이며 이곳에서 성실하고 친절하게 일했을 R의 노고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앞서 거슬리던 상황들은 따듯하고 달큼한 바나나 타피오카 푸딩과 함께 입 속에서 녹아버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다양한 색감의 조명이 촘촘한 야경을 보며 감상에 젖다가도 알량한 죄책감에 어정쩡하게 즐기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오늘 오전 중에 만든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아 부담이 덜하고 진한 초콜릿 플라워레스 케이크를 꺼내온다. 아참, 그전에 트리모양으로 구운 버터쿠키를 데코레이션으로 새하얀 생크림 위에 꽂고 크리 쿠키 위에 슈가 파우더도 뿌렸다.
하지만 저녁 먹은 직후라 도저히 뭔갈 더 밀어 넣을 공간이 없는 우리는 케이크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간단히 축하 후 케이크 한 조각을 나눠 먹는다. 뭐야.. 너무 맛있는데..? 생각보다 더 잘 나온 케이크에 호들갑 떨며 R에게 '맛있지?!' 연신 묻는다.
푸드 코마 직전의 우리는 거실 불을 끈 후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틀고 소파에 앉는다. '나 홀로 집에' 시리즈를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 본 우리는 이번 크리스마스 영화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당일도 우린 소파에 갇혀 하루 종일 해리포터 시리즈를 봤다. R은 직접 찾은 핫초코 레시피대로 작은 냄비에 여러 재료를 넣는다. 끓는 핫초코를 기다리는 R의 얼굴엔 맛이 어떨지 모르겠다는 약간의 걱정과 가족과 함께 보내는 명절에 상기된 모습이 아이같이 사랑스럽다. 머그컵 가득 담은 핫초코를 식탁으로 가져와 복실이를 안고 한 모금 마시며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해서 괜스레 찡해지던 마음은 욕심을 부려본다.
어색할 것 같던 온화한 기온의 크리스마스는 생각보다 눈이 그립지 않았다. 아마도 겨울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너희의 따스함에 폭 안겨 있어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