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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Apr 08. 2024

바다 좀 봐 미쳤어!

카이오나 해변

  '여긴 파도가 되게 거칠다! 그리고 바다 색깔도 다르고!'

  2019년 R과 함께 갔던 카일루아 해변은 알라 모아나 해변이나 와이키키 해변의 잔잔한 물결에 비해 거친 파도가 흰 거품을 마구 몰고 해변으로 밀려들었다. 하와이의 수많은 해변들은 위치와 방향에 따라 다른 분위기와 풍경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곤 기회가 될 때 다른 해변들을 가보려 한다.


  어디가 좋을까.

  '여기 어떤 거 같아?'

  구글 지도를 한참 들여보다 눈에 들어오는 카이오나 해변. 와이키키 해변과 다이아몬드 헤드를 지나는 해안도로를 30~40분 정도 달리다 보면 나오는 카이오나 해변은 바다색깔 때문인지 더욱 청량해 보인다. 궁금하네.


  점심을 먹고 스테인리스 물병과 복실이의 휴대용 물그릇까지 챙겨 나선다. 우기인 1월 중순, 일기예보에 비소식이 있어 당일 날씨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는데 다행히 맑은 하늘. 바람은 좀 불었지만 이런 날은 비가 내린대도 짧은 소나기라 바깥 활동하는데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익숙한 고속도로와 낯선 동네를 지나 와이키키 동물원을 끼고 해안 도로로 접어든다. 바다 바로 옆을 지나가는 줄 알았던 해안도로는 생각보다 좀 떨어져 있어서 아쉬웠지만 여전히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새삼스레 섬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구글지도에서 보던 섬의 테두리 어딘가를 달리는 자그마한 차 안의 나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해안가를 보며 테투리의 들쑥날쑥한 주름을 눈여겨보고 싶지만 눈부셔 가느다랗게 뜬눈으로 얼굴을 최대한 차창에 붙여본다. 

  그리곤 하나둘씩 보이는 고급주택들은 긴 해안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진다. 상당히 인상적인 건 사람키만큼 높은 담벼락과 버튼을 눌러야 열릴 것 같이 두껍고 튼튼한 대문은 입을 꾹 다물고 집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보일 뿐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포함, 호놀룰루의 주거지역은 대부분 낮은 담이거나 철조망을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보안에는 취약할 것 같은 이 방식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지는 베를린 장벽 같은 담벼락. 그래. 가진 게, 잃을 게, 그리고 지키고 싶은 게 많은 이들만의 방식이겠거니.

  프라이빗하고 번쩍거리는 동네를 지나면서 시답잖은 농담을 R과 주고받으며 우리가 평생 일해도 이 지역의 집은 절대 못 산다는 말과 함께 그냥 호탕하게 웃어본다. 


  본격적으로 엄청난 절경이 나올 것 같이 완만한 경사와 구불거리는 구간을 지난다.

  '헤!? 미쳤다! 바다 좀 봐 미쳤어!'

  절벽을 깎아 만든 해안 도로 옆으로 새파란 바다가 펼쳐진다. 다 내린 창문으로 밀려들어오는 세찬 바닷바람은 짠내를 머금고 차 안 가득 차오르더니 우리의 머리카락 마저 물결치게 한다. 광활한 바다를 일렁이게 만드는 것처럼. 오른쪽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왼쪽으로는 높이 솟은 산이 웅장하지만 여린 초록색을 띈 게 꼭 아이 같다. 운동장에서 한참 놀고 갈증에 시달리는 아이처럼 산은 강렬한 한낮의 햇볕 아래 타는 목을 열고 시원한 소나기를 기다린다. 

  바람에 펄럭이는 복실이의 귀 너머로 보이는 주차된 수많은 차와 방문객들. 전망 포인트뿐만 아니라 작은 규모의 주차장이 해안도로 곳곳에 있어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차를 잠시 세워두고 풍경을 볼 수 있다. 잠시 멈춰서 구경할 건지 묻는 R에게 괜찮다고 대답하곤 스쳐 지나가는 모든 풍경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어 오른쪽으로 완전히 틀어진 몸을 한 채 카이오나 해변에 다다른다.


  협소한 카이오나 해변 주차장 앞으로 난 도로 갓길에 주차된 수많은 차들 사이에 딱 차 한 대가 들어갈 공간에 주차한 후 해변으로 내려갔다. 주차된 수많은 차들을 보고 방문객들이 많을 걸 예상하긴 했지만 와이키키 해변의 밀도를 따라올 순 없지. '와, 이 해변은 정말 길다!' 도저히 이 해변의 끝을 가볼 수 없을 만큼 아득하게 먼 끝자락을 바라보며 뒤꿈치가 빠지는 해변을 걷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이오나 해변을 시작으로 와이마날로 해변과 벨로우즈 필드 해변, 이렇게 3개의 해변이 이어진 긴 해변이 아닌가. 아마도 와이마날로 해변 초입까진 걸어갔겠지. 카이오나 해변의 뒤로 가파르게 우뚝 솟은 산의 웅장함은 긴 해변을 따라 드문드문 있는 오래된 집들 조차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여준 신성함 그 자체로 보였다. 내리쬐는 한낮의 볕도 웅장함으로 만들어진 그늘 아래의 집들을 뜨겁게 달구진 못한다. 빼곡한 고층 건물들과 다양한 상가가 즐비한 도심의 해변인 알라 모아나 해변이나 와이키키 해변을 조금만 벗어나면 초록으로 뒤덮인 거대한 산이 지키고 있는 해변을 볼 수 있다니, 다른 차원의 문을 거쳐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신비로움이다.


  '여긴 카일루아 해변이랑 알라 모아나 해변 딱 중간 같아.'

  아이들도 스스로 곧잘 노는 도심 속 해변들과는 다르게 조금 거친 파도에 아이들은 어른들과 손을 잡고 넘실거리는 바다에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아니면 어른들의 품에 안겨서 말이다. 해변에 돗자리를 깔고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바다에서 노는 사람들은 몇 보이지 않는다. 약간 거친 파도 탓일까. 잡히는 물고기가 있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낚싯대를 에메랄드 빛 해변에 고정시키고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긴 해변 주변으로 가정집만 드문드문 있기 때문에 간단한 간식거리나 도시락을 싸서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잘 관리되지 않는 듯 쓰레기가 여기저기 있는 해변이 신경 쓰인다. 유명한 관광지보단 인근 주민들이 찾는 곳이라 편의시설이 잘 되어있진 않다. 그래도 모래를 씻어내는 수도나 화장실 및 바베큐 시설은 있으니 있을 건 있다고 해야 할까. 

  산 뒤편으로 회색빛 먹구름이 드리우고 곧 소나기라도 쏟아질 것같이 어둑해진 하늘에 발을 돌리다. 가벼운 복실이는 뒤꿈치가 빠지는 해변에서도 신나게 뛰어 우리가 처음 시작한 해변까지 금방 다다른다.


  돌아가는 길에 H마트에 들러 집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시간이 다 됐네. 밀려들어오는 파도에 젖어 모래 범벅이 된 복실이를 씻기고 그런 복실이를 안느라 같이 모래범벅이 된 나도 씻고 나와 R과 함께 저녁을 간단히 차린다. 

  서로를 찍어준 사진을 벌써 오래된 추억인 것처럼 아련하게 보며 카이오나 해변 근처의 오래된 집 지붕 위에 뜬금없이 있던 공작새가 떠올라 피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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