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니크 Sep 08. 2023

회사일은 내가 다한다

할 줄 아는 건 없는데, 이상하게 일은 제일 많이 하네요

“이번 건은 누가 할래?”
팀장님이 모두를 훑으며 묻는다. 

침묵이 지속된다. 다들 눈을 피하며 딴청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니수씨, 이번 건 해볼래?”

예상치 못한 제안에 자리에서 튀어 오를 뻔했다. 나 아직 신입사원이라고. “저.. 저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 프로젝트기도 하고, 6개월 됐으면 이제 한 건 해볼 때 되지 않았나? C차장, 맞지?”


일이 없었던 우리 팀은 공교롭게도 나의 입사와 동시에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일이 많다는 건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건 곧 나라도 동원이 돼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 네, 그럼요. 이번 건 정도는 시켜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차분한 차장님 목소리에 나의 내적 혼란만 증폭된다. ‘이거 맞아?’


“그래, 이번 건은 그럼 C차장이 좀 도와주고, 바쁘면 Y과장도 같이 봐줘. 기한 잘 지키고. 다들 바쁜데 이만 가자.” 나의 의견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아 물론, 중요하지 않았다. 


동공이 흔들리는 가운데 C차장님은 내 눈을 보며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 말을 들으니 문득 정신이 돌아온다. 열정 넘치는 신입사원의 마음에 불을 붙여 넣기 충분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며 나는 묻는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복잡한 설명을 쭉 들었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팀 내부 자료를 모으고, 타 팀 자료를 취합한다. 날것의 자료를 고객사가 만족할 만한 양식으로 통일한다. 내용을 검수하고, 제출한다.



자신감 넘치는 출발. 그런데 웬걸, 자료를 받는 것부터 쉽지가 않다. 이미 우리 팀의 각종 요구사항으로 유관부문은 컴플레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해도 아몰랑 하는 사람들. 메신저도 잠수다. 이럴 땐 별 수 있나? 찾아가야지. 자리에서 얼굴을 보고 도망 못 가게 잡아놓는다. 그리고 사소한 간식 - 나 같은 경우에는 꼭 해외에서 구한 걸로 - 을 손에 쥐어 드리면서 잘 부탁드린다고 친절과 너스레를 잔뜩 떤다. 막내가 와서 이렇게 하면 형편없는 자료라도 보내주더라. (솔직히 이건 남초회사고 여자라서 먹혔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본다)



자료는 간신히 기한 내에 모아졌다. 당연히 형편없는 자료들도 꽤 있다. 전화로 붙잡고 물어봄과 동시에 나는 또 나의 일을 해야 한다.


날 것의 자료를 해석하고, 새로운 양식에 채워 넣는다는 건 가장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업무다. 솔직히 내가 뭘 알겠나. 빵꾸를 내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작업을 위해 애를 쓸 뿐. 우선 A부터 Z까지 내가 알아볼 만큼 상세하게 자체 매뉴얼을 만든다. 자신이 없으면 일을 알려준 사람한테 쫓아가서 더 물어본다.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외운다. 외우지도 못한다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한다. A는 B에 넣고, C는 D에 넣는다는 걸 기억한다. 그렇게만 해도 업무는 해낼 수 있다. 다만 당연히 느릴 뿐. 그렇게 닥치는 대로 시간이 가고 있었다.

 



“니수씨, 하던 일 잘 되어가?”

Y과장이 내게 묻는다.

“아 ㅠㅎㅎ 처음 하는 거다 보니 어렵긴 한데, 어찌어찌하고 있어요.”

“응, 그래 잘하고 있네. 지난주에 말했던 회의자료는 잘 만들고 있지?


아뿔싸. 


그래, 나는 이 프로젝트 말고도 하는 것들이 있었다. 각종 주간/월간 회의체와 그룹보고용 요약자료, 정기 TF 회의 세팅 등등. 내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남들 하는 일도 계략적으로는 알고 있어야 했다. 회의체는 해야지. 

아, 이거 까먹을 뻔했네.


“아, 네, 그거, 음, 내일..까지 드릴게요..!!”

따르릉 하고 전화기가 울린다. 과장님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받으라 손짓하며 멀어지신다.



“아 안녕하세요 저 여기 누구 팀…”

정신없는 멘트에 상대방이 먼저 본인의 신분을 밝힌다.

“전략팀에서 연락드렸는데요, A프로젝트 관련 혹시 어떤 분께 여쭤보면 될까요?”

“아 네네! 그거 저한테 얘기하시면 됩니다!”

“네 ㅎㅎ 그럼 혹시 B프로젝트도 상황 잠깐 듣고 싶은데, 그건..”

“아 네네 그거도 제가 말씀드릴 수 있어요” (A를 시작하기 전 Y과장님이랑 둘이 하던 거다)

“하하 얼마 안 되셨는데 벌써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혹시 그럼 C회의체 자료는 어떤 분이 작성 중이세요?”

“하하하 네네 그거도 제가 담당이네요..?”

 



며칠 뒤, 어찌저찌 기한을 맞추기 위한 프로젝트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차장님의 서포트 – 라고 쓰지만 엄청난 잔소리와, “다시”가 있었다 – 를 받은 따끈한 신입의 손때 코 때 묻은 보고서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마치니, 팀장님이 나와 차장님을 보며 말한다. 

“C차장이 많이 도와줬구만? 이거 숫자는 다 확인한 거지?” 

그렇다. 사실 보고서에선 차장님 스타일이 많이 묻어났다. 근데 처음으로 듣고 싶었던 말은 사실 ‘고생했다’ 라거나, 칭찬이었는데. 쩝.


“놓고 가, 이건 생각 한 번 해보자. 그리고 C차장, 지난번에 B프로젝트 건은 어떻게 됐지? 

아. 니수씨는 이제 자리 가도 돼.”



어라?

꼬박 한 달을 고생해서 만든 결과물인데. 나의 예상과는 너무 다른 상황이다. 

 


끝? 끝.

쩝. 너무 싱겁다.



이전 06화 남초회사에서 살아남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