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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크 Aug 20. 2023

남초회사에서 살아남기

모든 회식에 낄낄끼끼하는자의 최후

“저녁에 약속 있나?”


불타는 금요일 오후 5시 30분, 퇴근이 30분 남은 시점이다. 

친구들이랑 간만에 단체 모임을 잡아놓은 상태. 얼마 안 된 회사 생활 썰을 풀 준비로 벌써 입이 근질근질하다.

“약속 있으면 말고~ 근데 옆에 00팀 알지? 거기 팀이랑 교류회 하는 자리라서. 누구누구 올 건데 혹시 괜찮으면 참석해~”


매우 곤란하다. 



"절대 '여자라서~'라는 말을 듣지 말아야지."


남초 회사에 들어오며 세운 나만의 제1원칙이었다. 

사회에서 흔히 얘기하는, 이를테면 "무거운 것도 못 들고", "회식도 빠지고", "같이 있기 불편하고" 따위의 말이 나는 너무 듣기 싫었다. 애초에 내 성격 자체가 ‘여성여성’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대학 때 술도 적지 않게 먹어봤고, 운동도 많이 했다. 주위에 남자사람친구들도 늘 많았다.

어쩌면 내 목표는 "니수는 다른 여자들이랑 달라~"라는 평가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여, 나는 나름대로의 그라운드룰을 정했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회식에 절대 빠지지 말자"는 원칙이었다.

그런데 그게 하필 오늘이었다. 간만에 약속을 잡아본 금요일 저녁. 


하필 또 과장 이상 직급들이 모이는 자리라니. 

알고 있다. 나는 그냥 짝수를 맞추는 신입사원일 뿐인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나? 나는 나의 원칙이 있는 것을.

나는 이 회사에서 잘해보고 싶은 것을.




"ㅠㅠ 나 못 갈 것 같아…… 번개 잡힘, 팀 회식."

처량함을 한가득 담아 단체톡방에 메시지를 띄워본다. 

"헐 ㅠ 오랜만에 얼굴 보는 줄 알았더니 ㅠ"

아쉬움을 담은 친구들의 톡을 애써 외면하며, 회사를 나선다. 



팀원들 차를 타고 도착한 해물탕집. 벌써 메뉴가 폴폴 끓고 있다. 

멤버는 알고 있었던 것과 같다. 과장 이상급 기혼 아저씨 7명, 그리고 나.


신입사원이란 명목 아래 관심을 받으며 소맥에 이어 소주를 한 잔, 두 잔 들이켠다. 

컨디셔라도 먹고 올걸 하는 후회가 언뜻 지나가지만, 아직 젊은 나의 간을 믿어보기로 한다.

선배들이 주는 술을 어때 마다할 수 있으랴? 아른거리는 해물탕 연기 너머로 넙죽넙죽 받아먹는 술.


이내 회사 이야기로 주제가 바뀐다. 옆 팀의 누가 어쨌니, 어제의 회의가 저쨌니. 

슬슬 소주도 물려올 때쯤, 주재원 복귀한 과장 한 명이 멕시코에서 사 온 거 라며 데킬라를 권한다.

‘소주 먹고 데킬라 괜찮나…?’ 란생각을 하면서도 이미 빈 잔을 보이고 있는 신입이었다.


"니수씨 술 잘 먹네~" 옆 팀 과장님이 따봉을 보인다. 

"그럼~ 얘는 따른 여자애들이랑 달라."

왜인지 뿌듯한 표정을 보이는 팀장님 앞에서 나도 속으로 히죽거려 본다. 정신은 몽롱해져 가고 있지만…


데킬라도 다 끝나 간다. 벌써 2병이나 비웠다. 

나도 슬슬 한계가 오는 기분이 든다. 아직 파장의 분위기는 진짜 아니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한국 오니까 막걸리도 먹고 싶네? 다들 한 잔 하시죠!”

데킬라 과장이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머리 위로 흔든다.

“아유, 난 이미 만취야, 만취!” 얼굴 벌건 우리 팀 차장님이 너스레를 떤다.

“막걸리 잔 좀 주세요!” 


위기를 느낀다. 

동네에서 술 좀 먹는 여자 1이었다고 해도 직장생활 n년차 아저씨들을 이길 정도가 아니라는 걸 잠시 간과했다.

슬쩍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데 몸이 휘청휘청. 

어어어. 갑자기 속이 안 좋다. 뜨거운 해물탕의 열기가 밖의 선선한 공기로 바뀌었다. 정신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더 헤롱해진다. 간신히 화장실에 도착한다.




쿵쾅쿵쾅 문 두드리는 소리. 

잃은지도 몰랐던 정신을 차려보니 나 혼자 뻗어 있은지 한참이었던 것 같다.

“야야야 문 좀 열어봐~~!! 좀!”


대충 수습하고 문을 열어보니 걱정과 짜증이 가득한 우리 팀 과장님과 차장님의 얼굴이 보인다. 

“아오!!! 가자!!”


뻘쭘하면서도 정신없고 몽롱한 상태로 간신히 몸을 일으켜 본다. 

이윽고 자리에는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채로 차 안으로 집어넣어 진 나. 

차마 아무도 ‘적당히 먹었어야지’라는 말은 하지 않는 채로 집 앞에 도착한다. 

걱정되셨는지 집 앞 문턱까지 날 바래다 주신 과장님. 

“담엔 끝까지 살아남고~”라는 말을 남기고 가신다.


이게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못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신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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