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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열쇠가 되는 날

Tristeza

by 송영채

딸들에게,

이 세상에 마음속에 상처 하나 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야. 엄마도 자라면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상처받는 일이 있었어.


어릴 적엔 상처를 받으면 바로 표현하고 울기도 했지만, 가끔은 그 상처들을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기도 했어. ‘저 좀 봐주세요, 너무 아파요.’라고 꺼내놓고 말할 수 없는 상처들도 있더라고. 너무 어려서 그게 정확히 어떤 상처인지도 몰랐지만, 왠지 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마음속에 하나둘씩 상처를 쌓아 두었던 것 같아.


그때 상처를 간직했던 건 기억했다가 나중에 갚아 주려는 마음은 아니었어. 돌이켜보면, 다쳐서 펄떡펄떡 뛰는 마음에 당황해서, ‘나중에 더 커서 꺼내 봐야 할 것 같아’ 하고 숨겨뒀던 것 같아. 상처를 들여다보고 해소하기엔 아직 너무 어렸지만, 언젠간 다시 마주해서 잘 다뤄내고 싶다는 마음이었던 거야.



그런데 상처들이 마음에 하나둘 쌓여가면서 때론 나를 옥죄고 내 모습과 성격을 바꾸기도 했어. 성격은 더 소심해졌고, 타인에 대한 기대나 믿음도 줄어들었지.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니 알겠더라. 그 상처들이 나를 나쁘게만 바꾼 건 아니었단 걸.


그 상처들은 겨울철에 생기는 굳센 나이테처럼 엄마 안에 켜켜이 쌓이며 엄마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줬단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상처들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가 되고,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하더라고.


이제 와서 그 상처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무 어렸기에 오해해서 만든 상처도 있었고, 별것 아닌 일에도 더 크게 아파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아. 나이가 드니 그 상처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이미 내 안에서 다 풀려서 해소된 상처들도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아니? 이미 다 풀어버린 상처들도, 엄마는 여전히 쥐고 있었다는 거야. 너무 오랫동안 상처를 잡고 있다 보니 습관이 된 걸까? 상처와 계속 함께 하려고 쥐고 있던 게 아니라, 언젠가 풀어서 보내주기 위해 쥐었던 건데, 엄마는 잊고 있었던 거야.


처음 그 상처들을 숨겨둘 때, 엄마의 어린 마음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몰라.

“이건 나중에 내가 더 크고 나면 꺼내서 해결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이제야 엄마는 알게 되었어. 그 상처들은 이제 더 이상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어떤 상처들은 지금쯤 마음 한편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을지도 모르지.


너무 부끄럽지만, 켜켜이 묵은 상처들을 엄마는 마흔이라는 나이를 넘긴 지금에서야 좀 털어보려고 한다. 꽉 쥐고 있어서 쉰내 나는 마음을 개운하게 털고, 햇볕에 바싹 말리고, 좀 더 밝아지고 말끔해진 얼굴로 어린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


“그땐 많이 혼란스러웠지? 그런데 네가 잘 품어준 마음의 상처들이, 지도가 되고 열쇠가 되어줬어. 네 어린 마음은 벌써 알고 있었던 걸까? 정말 고마워”



딸들아, 너희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게 될 거야. 억울한 일도 있을 거고, 뜻밖의 실망이나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어. 생판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한테도 상처받을 수도 있단다.


하지만 기억해 줄래? 너희는 상처 이전의 존재이고,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어린 너희가 그 모든 상처를 홀로 다 치유할 순 없을 거야. 엄마가 곁에서 너희 상처를 함께 보듬어주며 도와주고 싶지만, 너희도 아직 손대지 못하는 상처들을 어린 마음에 쌓아갈 수도 있어. 엄마도 모르게 말이야.


하지만 너희 마음속 상처가 결함이나 부족함,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해 줘. 네 마음의 상처와 네 본모습은 아무 상관이 없단다. 상처를 치유하고, 미로같이 얽혀있는 길을 찾을 때까지만, 그 상처와 함께하면 되는 거야. 상처는 너희를 자신만의 인생으로 데려다줄 때까지만 잠시 머무는 손님일 뿐이거든.


그리고 언젠가, 그 상처를 부드럽게 품어주다 보면, 너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야.


“상처야, 잘 있었지?

이제 떠나 줘도 돼. 고마웠어.”


그리고는 상처와 가뿐하게 헤어질 그날, 너희가 부르게 될 노래를 엄마가 지금 먼저 들려줄게. 바로 ≪Tristeza (Goodbye Sadness)≫(슬픔이여 안녕), 지금 과거의 해묵은 상처들과 작별하고 있는 엄마를 감싸주고 있는 노래란다.


슬픔이여,

가슴 깊이 느껴지는 이 큰 슬픔이여

이제 내 마음에서 영원히 떠나가줘

다시 내 입술이 노래할 수 있도록


오늘부터

내 날들은 태양과 장미로 가득한 나날이 될 거야

내 삶은 노래가 넘실대는 축제가 될 거야


≪Tristeza≫ 가사 중




≪Tristeza≫(Goodbye Sadness, 슬픔이여 안녕)는 하롤드 로부(Haroldo Lobo)가 작곡, 닐치뉴(Niltinho)가 작사하고, 노먼 김블(Norman Gimbel)이 영어가사를 지었어. 엄마는 아스트루드 질베르투(Astrud Gilberto)와 워터 완들레이(Walter Wanderley)가 녹음한 버전을 들으며 편지를 쓰고 있어. 슬픔에게 담담히 작별을 고하는 맑고 가뿐한 음색과 청량한 오르간 연주가 노랫말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마지 오래된 상처 위로 햇살이 스며드는 느낌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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