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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Oct 30. 2022

사실 죽음은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사랑 속에서 태어났다. 사랑이란 장작에 창조의 불씨가 튄 순간 하나의 불꽃이 피어났다. 불씨는 기적적으로 불꽃이 되었지만 언젠가는 꺼질 것이다. 영원히 타오를 수 있는 불꽃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꺼지고 말 것이라면 주변을 태워 없애버리는 불보다는 따뜻하게 데우는 불이 되길 바랐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만을 주고 싶었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변함없고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런 사랑을 할 위인이 못 되는 사람이었지만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고 난 후는 달랐다. 나긋해지고 여유로워져서 세상 모든 것을 껴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 선선한 여름밤, 발코니에 앉아 명상을 했다. 온몸에 윙윙대며 진동하는 에너지가 도시를 뚫고 나가 지구 밖까지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런던 밤하늘을 총총하게 채운 별들을 보며 모두에게 사랑을 보냈다. 닿을 수 있는 한 아주 멀리.


3년 만에 한국 가는 비행기에서 남편은 가족들과 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했다. 내가 미쳤냐고, 그렇게 그리워하던 가족들을 사랑해주기만 해도 모자란 시간에 도대체 왜 싸우겠냐고.


첫날부터 동생과 싸웠다. 엄마랑도 강원도까지 가서 대판 싸웠다. 그 벌인 지 나는 공항버스에서부터 미국행 여정 내내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나는 도대체 왜 그럴까? 이래서 아가페를 신의 사랑이라고 하는 걸까? 미천한 인간이 결코 해낼 수 없는 종류의 사랑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뭐 어렵냐고,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싶다면 네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품으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일체유심조, 원수조차 네 마음이 만들어낸 거라고 하셨다. 카르마를 소멸시키고 싶다면 모든 중생을 나와 한 몸으로 보고 자비를 베풀라고 하셨다. 거의 모든 종교가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는 것을 영적인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


비현실적인 목표 설정이 문제였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마더 테레사처럼 이걸 이뤄내는 사람들은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겨우 죽음에 대해 명상 좀 한다고 해낼 수 있는 종류였다면 나는 이미 승천했거나 성불했어야 했다. 그래도 계속 계속 채워간 사랑이 내 안에서 넘쳐흐를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남편이 아기 얘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계속 회피해왔다. 지금 우리가 아기를 가지면 우리 모습 그대로 게으른 아기를 낳을 것이며 우리는 불행해질 거라고 했다. 너는 조금만 뭘 해도 피곤해하고 귀찮아하기 때문에 나는 독박 육아를 하고 우울해질 거라고. 매일 티브이만 보고 운동도 안 하고 건강관리도 안 하는 너의 모습을 아기가 다 닮을 거라고.


근데 이렇게 부정적인 방법으로 동기 부여하려는 나의 모습이 게으른 남편보다 더 싫었다. 왜 나는 아기는 너를 닮아 긍정적이고 흥이 많고 집중력이 높고 인싸일 거라는 말을 못 하는 걸까.


한국 가서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았다. 엄마도 그렇게 잔소리와 핀잔을 주면서 남들을 교화시키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자라면서 그 모습을 무척이나 싫어했다는 것도. 그럼에도 나는 엄마와 똑같은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엄마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나는 엄마가 누군가에게 과시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필요 이상으로 설명을 할 때마다 잔소리를 했다. 동생에게는 식사예절에 대해 꾸중을 하고 정리를 안 한다고 야단을 쳤다. 선생질을 하는 건 결코 내가 가족에게 주고 싶은 사랑의 모습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을 끌로 깎아내려 티끌 하나 없는 완벽한 조각으로 만드는 게 내 일도 아닌데. 단점까지 다 있어야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완성되는 건데. 나는 얼마나 완벽하다고 오만을 떠는지 진저리가 쳐졌다.


그래도 가족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줬다. 완벽하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나를 향한 사랑만은 완벽해 보였다. 반짝반짝 빛나고 흠집 없이 예쁜 사랑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사랑을 주는 그들과도 작별할 날이 온다고 생각하면 다시는 화를 내고 싶지 않아 졌다.


명상에 빠져서 나를 잊게 되는 순간 몸이 서서히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몸의 테두리, 나를 규정하는 그 경계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혹시 내 몸을 이루는 물질들이 하나하나 입자에서 파동으로 바뀌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나도 파동이 되어 주변으로 녹아드는 것 아닐까?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강한 에너지가 온몸을 압박해왔다. 빛이나 자기장 같은 게 나를 통과해 세상과 나를 꽁꽁 묶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주 팽팽하고 질긴 거미줄에 단단히 붙들린 기분이기도 했다. 물론 명상을 하면서 뇌파가 바뀌고 이로 인해 단순히 의식의 왜곡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 사랑의 감정은 착각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우주가 친 촘촘한 그물에 걸려있다. 서로가 흔들릴 때마다 같이 흔들린다. 그물 안에서 우리는 혼자지만 함께이기도 하다. 바다에 떨어진 빗방울 같다. 빗방울은 입자 상태로는 그대로지만 바다 전체로 확장되어 존재한다. 물방울들을 바다로 묶는 힘이 중력이듯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 힘은 사랑이다.


웨딩피치와 해리포터는 사랑을 모르는 당신은 불행해요라고 말했다. 사랑의 화가 샤갈은 그림뿐 아니라 사랑에 대한 참 많은 명언을 남겼다.

모든 삶이 필연적으로 끝을 향해 간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삶을 우리만의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
_마크 샤갈

우리 모두 지구에서 짧은 경험을 하고 떠날 존재들이라는 걸 잊지 않으면 모든 행동에서 사랑이 흘러나온다. 나를 사랑하는 것도 더 쉬워진다. 우리는 여태껏 살면서 저지른 잘못들과 모든 나쁜 생각들까지 알고 있어서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들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모르고, 그 모든 행동들이 다 나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고.


나와 남을 사랑할 때 우리의 몸과 정신은 사랑이라는 에너지가 머무르는 공간이 된다. 사랑이 통하는 그 채널이 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 찬 사람, 장소, 사물, 공간들과 이어지게 되고 더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죽음은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떠올리고 나면 삶의 모든 것들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더 사랑하고 싶어 진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삶의 끝에서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두고 심판받을 거라고 했다. 카뮈는 또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증언해 줄 것인가. 우리의 작품인가, 철학인가. 아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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