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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Oct 30. 2022

죽음이 건네준 선물

죽음을 떠올리다 보면 삶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매일 죽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나서 나는 지금 지구에서 경험하는 나의 삶이 꽤 경이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끝을 인식함으로써 지금껏 나를 괴롭히던 모든 과거와 현재의 시련들이 아득해진 덕이다.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새로이 보인다. 모든 것과 아주 얇고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실로 연결이 된 것만 같다. 같은 박동으로 뛰고 있는 무한대의 심장을 느낀다. 나뭇잎 속에서, 돌멩이 속에서, 펄떡대는 원자의 움직임 속에서 나는 무한대로 고요해진다. 그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토록 건강하고 평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자각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고 난 어느 날이었다. 공기처럼 나를 둘러싼 평화 속에서 눈을 떴는데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삶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불쑥 불신이 돋아났다. 가랑비에 젖었다 서서히 말라갈 때처럼 명상 뒤의 축복이 서서히 가시자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이 의심스러워진 것이다.


죽음 뒤에 정말 아무것도 없다면 어떡하지? 우리가 무의미한 삶을 살다가는 어떤 우연에 의해 생긴 유기체일 뿐이라면?


그러라지. 어차피 미물 혹은 피조물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오히려 그게 사실이라면 더더욱 지금 내 안의 신성을 믿으며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다가는 게 이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중에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해도 평생을 의심과 불안 속에 살다가 지옥행 다이빙을 하는 것보다는 백번 낫지 않을까.


보통 명상 뒤에 긍정의 격언이 적힌 카드를 하나 뽑는데 바로 이때 Trust라는 카드가 나왔다. “끝에는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는 것을 믿는다. 그냥 내 직감이 그렇기 때문에, 나아가서는 믿음과 자신감 속에 사는 삶이 자기 방어적인 회의론자로 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누군가에게 확답받은 기분이 들었다.


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나 같은 사람이 삶에 감사하기 위해선 죽음에 대한 생각이 필수적이었다. 지루하게 느껴지던 일과나 동네는 이사 가기 직전에서야 애틋해지고, 과거라 손에 쥘 수 없다는 이유로 고통마저 조금씩은 미화되었다.


달라스에서 이사를 앞둔 어느 아침 요가를 하는데 사시사철 창밖으로 보이는 상록수가 느닷없이 예뻐 보였다. 나뭇잎들이 스스스 바람에 춤을 추는 소리와 평화로운 동네의 겨울 풍경에 도취되어 동작을 멈추고 한참을 서있었다.


연말에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의 마음이랑은 사뭇 달랐다.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2주 내내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요가를 했었다. 집에 돌아오자 장엄한 카리브해에 비해 무척이나 초라해 보이는 뒷마당 뷰가 실망스러웠다. 해변가에 집을 짓고 거기서 매일 바다와 떠오르는 해를 보며 요가를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입맛을 다셨다. 그래 놓고 동네를 떠날 시기가 오니 별 것이 다 정답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간사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에도 모든 것을 떠나기 직전에 마음으로 대하면 어떨까. 죽기 전에 사람이 회개를 하고 개과천선을 하듯이 불평만 하던 나도 죽음 덕분에 모든 것을 새로이 보게 되었다.


나는 생존을 위한 허드렛일이 귀찮은 사람이었다. 아침에 샤워하는 것조차 짐스러워 왜 사람 구실이 이다지도 어려운지 넋두리를 했다. 부잣집 애견이 되어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망발도.. 그러나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고 나오면 모든 것이 비 온 뒤 풍경처럼 반짝였다. 따뜻하고 깨끗한 물이 내 피부에 와닿는 것조차 감탄스럽게 고마웠다. 점점 더 그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지구에서 한정된 나의 시간 동안 내가 샤워를 할 수 있는 횟수는 채 만 칠천 회가 안됐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 존엄 있게 사는 인간의 특권들을 누리는 중이었다. 인생의 유한성을 인지하는 것이 나를 이리도 바꿔놓았다.


내가 우울의 수중에서 벗어나자 동생이 그 손아귀에 붙들렸다. 동생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없던 나는 매일 동생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바로 감사한 점 10가지를 쓰는 숙제였는데 나의 우울증 극복에 가장 도움이 됐던 방법이었다.


동생은 의외로 성실하게 따라와 주었다. 오늘 떡볶이를 먹을 수 있어서, 늦게 일어났는데 지각을 안 해서 감사했다는 동생의 하루를 되짚으며 크게 안심했다. 괴로움만 토로하던 동생 인생의 크고 작은 행운들이 나를 벅차게 했다. 감사하기 연습을 한 지 2주가 된 날이었다. 동생은 횡단보도에서 색색깔로 빛나는 신호등을 보고 색맹이 아니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어서 자기도 깜짝 놀랐다고 했다.


멸종 위기의 동물들처럼 우리는 언제나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황홀해야 한다. 그게 삶과 죽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더 감사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것은 이미 많은 심리학과 뇌과학 연구에서 입증되었다. 감사할 때 우리의 뇌는 행복의 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시키고 도파민 분비를 하는 뇌간을 활성화시킨다. 버클리 대학에서는 감사일기를 쓴 사람들의 뇌를 관찰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들의 뇌는 감사일기를 쓰지 않은 사람들보다 학습과 결정을 주도하는 내측 전두엽에서 현저하게 많은 활동량을 보였다. 감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이스턴 워싱턴대학과 뉴욕 호프스트라 대학 심리학과에서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죽음에 대해 실감 나는 상상을 한 실험자들은 그렇지 않은 실험자들에 비해 삶에 대한 감사라는 감정에서 아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명상 뒤 꽃병에 꽂혀있는 꽃이 시선을 끌었다. 이 아름다운 꽃들조차 다시는 못 보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 이걸 보고 느끼고 있나? 예쁘다고 사진이나 찍어댔지 꽃을 제대로 보긴 한 걸까? 지금 내 눈앞에서 꽃 고유의 원자로 진동하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정말로 경험하고 있는 걸까? 저렇게도 무해하고 고운 색깔을 하고 곧 사라질 꽃들을 나는 진심으로, 모든 감각으로 느끼고 있는 걸까.


하늘색과 라벤더 색이 오묘하게 섞인 빛깔, 앙증맞은 봉오리들과 애처로울 만큼 보드라운 꽃결. 햇빛을 받은 눈처럼 반짝이는 꽃잎과 풋풋한 생명의 냄새를 작정하고 집중해서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게 꼭 꽃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인 듯 낯설게 느껴졌다. 이게 내 생애 마지막 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어쩌면 그래서 처음과 끝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어져있다. 무한대를 나타내는 누운 8처럼.. 삶과 죽음도 그 영원 속에서 이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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