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성 췌장염으로 입원한 날
내일(11월 26일)은 블랙이의 악성 종양이 전이가 됐는지 확인하러 병원 가는 날인데, 어쩐지 늦기 전에 이 강아지의 예전 투병 기록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쁜 소식이 있으면 나쁜 소식에 잠식당해서 더는 못 쓸 것 같기도 하고, 좋은 소식이 있으면 또 글 쓰는 걸 한 없이 미루게 될 것 같기도 하고. 변덕스럽지만.
블랙이는 2023년 올해 3월에 급성 췌장염이 와서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이 건은 사실 블랙이의 노화보다는 나와 남편(이하 j)의 부주의가 커다란 원인이었다. 블랙이가 앓고 있던 쿠싱 증후군의 영향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길게 서술하기에 앞서 요약하자면, 아무리 유기농 수제 건강 간식이어도 강아지 발바닥 크기보다 큰 간식을 한 번에 주면 안 됩니다!!
벌써 반년이 지난 사건이라 기억이 듬성듬성해서, j와의 카톡 기록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우선 3월 24일은 둘째 브라우니를 입양한 날이어서, 생일이라고 부르며 매년 특식을 사 와서 먹여주곤 했었다. 올해는 특별히 j와 결혼한 뒤 처음 맞는 브라우니의 생일이어서, 동네의 수제 반려동물 간식점에 브라우니 생축 레터링 케이크를 주문했었다. 단호박과 닭가슴살 등으로 만들어진 강아지 용 케이크는 새 두루마리 휴지 정도의 지름과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높이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였다. 문제는 그 케이크를 너무 짧은 기간에 다 먹였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한 끼에 다 준 것은 아니고, 브라우니 생일 당일 저녁에 케이크를 네 등분해서 블랙이와 브라우니에게 한 조각 씩 주었다. 짧은 생각이었지만 우리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남은 두 조각을 또 공평하게 한 조각 씩 나눠 주었다. 한국인 정서 상 케이크는 간식이기 때문에, 밥인 사료는 조금이라도 따로 줬었다.
그리고 며칠 뒤인 29일 저녁에 j가 먼저 귀가했고, 나는 꽤 먼 곳으로 출퇴근을 했기 때문에 가는 길이었다. 저녁 8시가 넘었을 때,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는 와중에 j에게 전화가 왔다. 자신이 귀가했을 때 토가 여러 개 있기에 치웠는데, 블랙이가 세 번 정도 토를 더해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는 전화였다. 사실 블랙이나 브라우니나 공복토를 하곤 했어서 토하는 것 자체가 낯설진 않았는데, 지속적으로 토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집 근처 다니던 동물병원은 마감해서, 저장해 뒀던 24시 동물병원에 가야 했는데 그곳은 거리가 좀 있어서 차로 이동해야 했다. 여기서 교훈 1. 평소에 평이 좋고 집에서 가까운 24시 동물병원을 조사해 두자.
악재는 한 번에 오는 것인지, 마침 우리 집 자동차는 배터리가 방전되어 주차장에 방치된 채였다. 결혼 전에 내 차였던 지라 보험사 출동 서비스를 이용해 본 적이 없는 j에게 전화번호와 호출 방법을 안내하고, 블랙이의 상태가 많이 안 좋냐는 질문만 반복했다. j는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보험사에 전화하느라 바쁜지 답이 없었다. 지하철은 느릿느릿하게 집을 향했다. 교훈 2. 방전된 차는 미루지 말고 즉각 고치자.
배터리 충전을 마쳤을 때 마침 나도 주차장에 도착해서, 궁금했던 블랙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j가 답장하기 어려웠던 이유를 바로 알았다. 블랙이는 차에 타는 것을 아직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차에 타면 씩씩거리거나 간식을 먹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데, 보조석 카시트에 축 늘어져서 아무런 활기가 없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서 누가 보면 편하게 쿨쿨 자는 것 같았겠지만, 문제는 블랙이가 차에서 자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혼자 카시트에 앉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j가 운전하는 동안 나는 브라우니와 뒷좌석에 앉아서 블랙이의 코에 손가락을 대보고 블랙이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다지 추운 날이 아니었음에도 블랙이의 몸이 차가웠다. 카시트가 축축해서 몸이 차가워졌나 싶어서 왜 이렇게 젖었는지 물어보니, 블랙이가 이미 카시트에도 토를 했다고 했다. 병원으로 가는 초행길에 어느 쪽 골목으로 들어가야 되는지 언성을 높였던 거 같기도 한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도착하자마자 블랙이를 테크니션 쌤에게 건네고, 증상을 설명하고, 혈액검사 등등을 간략히 안내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뒤늦게 안내 데스크에 붙어있던 '야간 진료는 기존의 심장병 등으로 진료를 다니던 반려동물만 가능하다'는 안내문을 확인했다. 블랙이는 말 그대로 응급환자여서 받아준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대기환자가 없어서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미 기운이 너무 없고 체온도 34도 정도로 낮아서(원래 개의 체온은 37도~39도) 대기환자가 있었더라도 배려를 받았을 것 같다.
동물병원에서의 기다림은 기본 30분 정도가 된다. 나름대로 익숙한 나는 블랙이를 데리고 처음 24시 동물병원에 갔던 일화에 대해서 j에게 얘기해 주었다. 블랙이가 7살 무렵이었던가. 블랙이를 데리고 산책을 갔다 왔는데 블랙이의 앞발이 퉁퉁 붓고 제대로 걷질 못했다. 밤이어서 급하게 주변의 24시 동물병원을 검색하고(이후로 미리 찾아서 저장해 두는 게 이사 루틴이 되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택시기사에게 개를 데리고 탈 거면 케이지를 하거나 어쩌고 저쩌고 하는 꾸중을 들었다. 그러나 그 꾸중보다 블랙이가 짖고 우는 소리가 더 커서 기사는 이내 조용해졌다. 도착하자마자 블랙이를 안고 안내데스크에서, "강아지 발이..."까지 말하고 오열했다. 테크니션 쌤은 보호자의 오열에 익숙한지, 다소 매정한 태도로 순서를 기다려야 된다고 하며 접수해 주었다.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서운한 마음으로 대기실에 앉아있는데, 그 대기실에 있는 강아지 중 블랙이가 제일 건강해 보여서 금방 머쓱해졌다. 블랙이는 택시에서 내린 이후로 딱히 울지도 짖지도 않고 그냥 심심해서 찡찡대고만 있었다. 진단명은 '벌레 물림'이었다. 안도의 눈물을 흘리기엔 이미 쪽팔려서, 자못 태연한 척 약을 받아서 다시 택시에 탔다. 그 강아지가 차에 타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그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열심히 낄낄댔다. 초면인 사람 앞에서 그렇게까지 눈물을 쏟은 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블랙이가 얼마나 엄살쟁이인지, 지금은 차를 얼마나 잘 타게 된 건지를 얘기하면서. 이번에도 별 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24시 동물병원의 초월적인 비용에 대해서나 걱정했다.
블랙이는 급성 췌장염이었다. 수의사 쌤은 급성과 만성의 차이에 대해서, 짐작되는 원인에 대해서, 치료 방향에 대해서, 그리고 아주 적지만 죽을 확률에 대해서 친절히 말해주었다. 오늘 밤이 고비라고. 나는 사망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는데, 입을 떼자마자 눈물이 나서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수의사 생활을 하면서 다섯 마리 정도의 케이스를 봤다고 했다. 아주 적었다. 그리고 2박 3일 입원을 해야 한대서, 브라우니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 전에 입원장에 들어간 블랙이와 인사를 했다.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 사진이 될까 봐 찍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마지막이 되면 후회할까 봐 두 장 정도를 찍었다. 병원도, 입원장도 아주 많이 싫어하는 블랙이인데 이 때는 정말 조용했다. 테크니션 쌤이 "강아지가 너무 얌전해요~"라고 위로의 칭찬을 해주어서, "원래는 성격이 나빠요" 하면서 또 울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나는 급성 췌장염에 대해 검색했다. 군고구마 호일을 먹고 입원한 강아지, 노견 급성 췌장염 치료 후기, 등등. 집에 도착해서는 마침 블랙이의 똥에서 비닐 조각 같은 것이 나와서 병원에 찍어 보냈고, 짐작 가는 원인에 대해서 검색했다. j와 맥주 한 캔씩을 꺼내 먹으며 검색 결과를 공유했다. 완치 케이스가 많다, 오늘 밤이 고비인데 아직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면회를 각자 언제 갈까 등의 이야기를 했다.
3월은 나와 j가 결혼한 지 반년 정도가 된 시점이었는데, j는 강아지를 키워보고 싶단 생각만 했을 뿐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는 강아지들과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친해질 수 있다면서 아침 조깅, 산행 등등 어려워 보이는 계획들을 세웠다. 함께하는 루틴이 있어야 가까운 존재가 된다나. 그렇게 강아지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j가 이렇게 힘든 밤에 같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나는 평소 같았으면 우리 둘 사이에 어거지로 끼어서 팔베개를 하고 자던 블랙이가 없으니까 허전하다는 얘기를 했다. 겨우 말을 마무리 짓고 눈물을 닦고 있는데 j의 답변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천장을 보면서 누운 j가 엄청나게 울고 있었다. 블랙이와 함께하는 아침 조깅을 한 번도 실천한 적 없으면서 언제 저렇게 진심이 된 건지 웃기면서도 위로가 됐다. j는 코가 막힌다며 일어나 앉아서, 계속 췌장염에 대해 검색했다. 괜찮대, 낫는대, 같은 말을 계속 주고받다가 겨우 잠들었다.
입원 다음 날, 아침에 면회를 간 j가 블랙이의 체온이 많이 돌아왔고 활기를 되찾았다고 말해주었다. 위기를 넘긴 모양이었다. 나는 오후에 면회를 갔는데, 블랙이는 정말 쾌활해져서 그 짧은 발에 수액 바늘을 꽂고서도 열심히 뛰어다녔다. 계속 나가자고 해서 잠깐 안고 주변을 돌아보고 왔다. 입원장을 답답해하는 블랙이의 성정을 아는지라 세 시간 정도 같이 있다가 왔는데, 그 시간 동안 나 같은 면회 손님을 꽤 볼 수 있었다. 걸어 다니는 강아지는 블랙이 뿐이었다. 진단 기기와 수액 걸이에 연결된 채로 같이 나와서 보호자 품에 안겨있는 작은 강아지도 있었고, 중년의 부자가 함께 와서는 햇볕을 쬐어준다며 동물병원 바로 앞 벤치에 앉아 한참을 안고 있던 강아지도 있었다. 남일 같지 않아서 너무 슬펐다.
입원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블랙이의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음을 직감했다. 익숙한 짖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테크니션 쌤에게 죄송하다고 원래 병원을 싫어하고 시끄럽다고 했다. 테크니션 쌤은 활기차고 좋다고 해주셨다. 친절하신 분.
블랙이는 다행히 모든 수치가 정상을 되찾아서 퇴원했다. 퇴원하면서, 쿠싱과 췌장염 같은 합병증 관리를 위해 기존의 집에서 가까운 동물병원에서 다소 멀지만 비싸고 내과질환을 잘 보기로 유명한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췌장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사료를 저지방식으로 바꿨다. 이때를 기점으로 블랙이의 병원비+사료비가 다섯 배 정도로 뛴 것 같다. 한 번 블랙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험을 했더니, 다시 합리적인 선으로 내려가는 게 도통 쉽지 않다.
옮긴 병원은 예약제여서 한 타임에 한 손님만 있었는데, 한 번은 예약 시간에 맞춰 찾아갔는데 테크니션 쌤이 응급 환자가 있다고 기다려주시라고 하면서 죄송하다고 여러 번 하신 적이 있다. 그때는 블랙이의 검진 차원으로 방문한 거였어서 별생각 없이 그러시라고 했는데, 과연 대기실에 다른 보호자가 있었다. 블랙이와 브라우니를 보면서 밝게 인사를 하셔서 강아지들의 나이를 알려드리고, 어떤 증상으로 내원했는지를 조심스레 물어봤었다. 강아지가 갑자기 못 걸어서 급하게 왔다기에, 내 마음이 다 철렁했다. 나와 j가 아침을 안 먹어서 근처 빵집에서 빵을 사 오는 길에, 그 보호자분께 드릴 작은 간식도 사 와서 드리면서, 디스크 같은 별거 아닌 일일 거라고 위로를 건넸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디스크도 작은 일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갑자기 동물 병원에 방문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너무 잘 알아서 오지랖을 부렸었다. 동병상련의 병이 자꾸 늘어만 간다.